[시사뉴스 정춘옥 기자] 예능계를 ‘욜로(YOLO)’ 키워드가 점령했다. 방송사들은 경쟁적으로 ‘욜로’ 트렌드를 앞세운 프로그램들을 내세우고 있다. 하지만 이들 예능은 ‘욜로 라이프’에 대한 현대인들의 욕망을 판타지로 범벅한 상품으로 제공할 뿐, 철학을 담아내지 못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마치 TV홈쇼핑에서 ‘나를 위한 소비’로 포장하며 소비 심리를 부추기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욜로’를 파는 예능들이 쏟아지고 있는 것이다.
각박한 삶에 대한 도피
tvN ‘윤식당’의 성공은 예능계에 ‘욜로(YOLO)’ 열풍을 몰고 왔다. 나영석 PD의 예능은 대부분 같은 코드로 연승했다. ‘꽃보다 할배’ ‘삼시세끼’ 등의 나 PD 성공작들은 모두 인생의 본질적 행복을 탐닉한다. 심지어 국내에 ‘욜로’라는 용어를 대중화시킨 프로그램이 나 PD의 ‘꽃보다 청춘’이었다.
최근의 ‘욜로’ 예능 트렌드는 나 PD 식의 ‘자연 속의 인간’ ‘도심을 벗어난 힐링’ ‘여행을 통한 즐거움’이 대세다. MBC ‘무한도전’의 ‘녹도편’을 비롯, tvN ‘주말에 숲으로’ ‘섬총사’, 온스타일 ‘다이아’s 욜로트립’, JTBC ‘효리네 민박’, MBN ‘여행생활자 집시맨’ 등은 모두 일상을 벗어나 자연 속에서 힐링하는 아이템이다.
이 프로그램들은 물질주의에 대한 거부감과 현실의 경쟁적 삶에 대한 도피의 판타지를 공통분모로 가지고 있다. 이에 반해 올리브tv ‘어느날 갑자기 백만원’은 ‘백만원을 마음껏 쓴다’는 차별화된 아이템을 설정했다. 백만원으로 자신의 취향에 맞게 소비하는 출연자들을 통해 대중들이 대리만족을 느끼는 이 프로그램은 여타 ‘욜로’ 예능이 비물질주의적 판타지를 추구하는 데 반해, 물질로 인한 자기만족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는 점이 과감하다. 하지만 다양한 자기만족적 소비와 선택의 순간을 보여주면서 ‘욜로 라이프’를 추구하고 부추긴다는 점에서 맥을 같이 한다.
지금 이 순간의 행복
‘You Only Live Once’를 의미하는 ‘욜로’는 미래를 위한 희생을 가치있게 생각하던 기존 사고에서 벗어나, 지금 이 순간의 인생을 즐기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나’ ‘개인’에 대한 자각에서 출발한 이 가치관은 경제적 불황과 서구식 개인주의 철학의 만남으로 극대화됐다.
고속 성장기에는 현재의 재화가 미래에는 몇배로 증가하는 현상이 당연시됐다. 은행에 돈만 넣어둬도 이자가 물가상승을 앞지르고, 부동산은 몇배로 오르고, 사업에 투자하면 대대손손 상류층이 되는 기대도 해볼 수 있던 시대. 단순히 물질적 재화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열심히 공부하면 계층도 그만큼 높아지는 것이 보장됐고, 심지어 사랑도 정성을 들인 만큼 결실을 맺을 가능성이 지금에 비하면 높았다.
지금 이 순간 소비나 욕망을 참으면, 미래에는 몇배로 커져서 안정되고 풍요로운 내일을 보상한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억압과 부조리마저 견디면 언젠가 진흙탕 속에서 용으로 변신하고, 고생 끝에 낙이 오며, 희생한 자가 복을 받는다는 신화가 유지되던 고속 성장기에 ‘을’이 ‘갑’이 되는 순간을 꿈꾸며 고통을 삼키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 아니었다. 기득권의 횡포 앞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침묵했던 배경에는 이처럼 나도 기득권이 될 수 있다, 적어도 내 자손이라도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존재했다.
하지만 성장이 멈추기 시작하자 신화는 깨졌다. 그런 의미에서 ‘욜로’는 서구보다 우리에게 더 강력한 의미를 지닌다. 새로운 세대는 현재의 희생이 과거의 달콤한 열매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개미처럼 돈을 모아도 집을 살 수 없으며, 아무리 발버둥쳐도 계층 사다리는 걷어차여져 없다는 것을. 이들 세대는 그래서 지금의 기득권이 영원한 기득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좌절감만큼 분노도 더 크다. 광화문의 촛불 또한 이 같은 분노를 먹고 자라났다.
내 욕망의 실체도 TV가 정한다
‘욜로’는 새로운 환경에서 탄생한 합리적 라이프 스타일일 뿐만 아니라, 불안한 미래와 기득권에 대한 좌절과 분노의 돌파구다. 트렌드를 중요시하는 최근의 예능 프로그램들이 ‘욜로’에 너도나도 손을 뻗는 이유다. 이들 프로그램들은 대중들의 욕망을 자극하고 판타지를 보여주며 대리만족을 선사한다.
문제는 많은 시청자들이 이 같은 프로그램을 소비하며 위안을 얻는 한편, 더 깊은 좌절감을 느낀다는 점이다. 특히 젊은 세대에게 회의감은 더 크다. 28세 취업준비생 김씨는 “TV 속에서 ‘욜로’의 삶은 결국 돈이나 시간이 있어야 하는 것들이더라. 최근에 추구하는 라이프스타일인건 맞는데, 아직 ‘욜로’를 실현하는 데 있어서 현실이나 기성세대와의 충돌이 많다”고 말했다.
문화평론가 이수미씨는 “‘욜로’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삶을 매순간 충실히 사는 것인데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마치 정해진 삶의 규격이 있는 것처럼 오해하게 한다”고 비판했다. 이들 프로그램들은 ‘욜로’ ‘힐링’을 팔며 소비하게 만들지만, 진정한 삶이나 ‘욜로’의 철학적 개념을 생각하게 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욜로’가 곧 ‘여행’을 의미하는 것도 아닌데, 예능 프로그램들은 ‘욜로’의 의미를 지나치게 국소적으로 취급한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무한도전’의 ‘녹도편’의 경우는 섬 주민들에 대한 스테레오타입, 섬을 대상화한 전형적인 도시인의 판타지 등이 ‘진부하다’는 평을 얻기도 했다.
특히 ‘어느날 갑자기 백만원’은 첫 방송부터 자극적이고 원초적인 ‘탕진’이 ‘욜로’인가라는 비난이 많았다. 미국 여행을 준비한 옥택연을 제외한 대부분 출연자들이 백만원을 ‘추구’나 ‘취향’에도 미치지 못하는 단순한 ‘탕진’에 가까운 소비를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의도하지 않았다고 해도 ‘어느날 갑자기 백만원’은 현대인들의 ‘욜로’에 대한 오해와 현실을 정확히 보여준 결과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