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박웅준 칼럼니스트] 서안(西安, Xi'an)의 8월 여름. 이곳은 기온이 40도에 육박할 정도로 뜨거웠다. 한낮에는 해가 쨍쨍하여 야외에서는 걷는 것조차 힘에 부쳤다. 그래도 습도는 우리나라보다 높지 않아 그늘에 가면 견딜만하다. 필자가 찾은 섬서역사박물관(陝西歷史博物館), 전체 7만여평방미터의 규모에 11만건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는 중국 최대 박물관 중 하나. 이곳에는 과거 실크로드를 종횡무진했던 소그드족과 신라인의 비밀이 숨겨져있다.
서안에 도착하자마자 찾은 곳은 박물관이다. 역사기행이라는 목적과 피서(避暑)라는 현실의 부합이 나를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이끌었다. 서안은 중국의 시작인 주나라부터 진, 한, 수, 당의 수도로 당시의 문화를 대표하는 수많은 유물 유적이 있고 지금도 땅 밑에는 얼마나 많은 것이 묻혀 있는지 가늠하기 어렵다. 특히 당나라 때는 장안(長安)으로 불리며 중국의 최전성기를 누렸는데 당시 장안성 내에만 인구가 100만이 넘었다고 한다. 이 중 상당수는 외국에서 온 사람들로 주변국은 물론이고 중앙 아시아와 유럽, 아프리카에서까지 왔다.
당 정부는 이들이 자유롭게 활동을 하도록 성 서쪽에 서시(西市)를 만들었다. 이처럼 다양한 인종이 뒤섞여 자유롭게 활동하게끔 한 당나라의 개방성은 장안을 당대 세계 최대의 메트로폴리스(metropolis)이자 코스모폴리탄(cosmopolotan)적인 도시로 만들었다.
시진핑은 현대판 실크로드인 일대일로(一帶一路)를 주창하면서 육지기반의 실크로드의 중심도시로 서안을 지목하여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서안 노동남로에 위치해 있는 예전 서시(西市)를 ‘대당서시(大唐西市)’ 란 이름으로 80억위안(약 1조4300억원)을 투자한 것은 예전 대당제국의 영화를 되찾기 위한 노골적인 역사적 오마주인 것이다.
중국 곳곳에 남긴 소그드인의 발자취
이러한 관점에서 박물관의 유물을 찬찬히 살펴보기로 했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한 눈에 봐도 중국인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무덤이다. 안가묘(安伽墓, An Jia Tomb)로 땅 밑에 묻혀 있던 돌로 된 관과 석문을 실물을 사용해 복원해 놓았다. 안가는 북주(北周, 557-581)시대에 서안에 기반을 두고 실크로드를 통한 무역 활동을 한 서역인이다.
기록에는 그가 고장(姑藏) 창송(昌松) 출신으로 살보(薩保) 및 대도독(大都督)을 역임하였다고 한다. 살보란 대상(隊商, Caravan) 즉 실크로드를 횡단하며 무역을 한 상인집단의 우두머리를 뜻하며 그의 성씨인 안(安)은 그가 소그드인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중국에서는 소무구성이라 하여 속특인(粟特人) 즉 소그드인을 출신지에 따라 강(康), 사(史), 안(安), 조(曹), 석(石), 미(米), 하(何), 화심(火尋), 무지(戊地)로 구분하였다.
안가는 출신지가 안국(安國)이라서 성을 안가로 한 것으로 안국은 지금 우즈베키스탄의 부하라(Bukhara)이다. 소그드인은 일반적으로 호인(胡人)이라고 칭했으며 조로아스터교(拜火敎,
Zoroastrianism)를 믿었다.
안가의 석관에 묘사되어 있는 다양한 그림에는 그가 생전에 했었던 무역, 연회, 수렵, 협상장면 등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어 당시 소그드인의 활동상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석문에는 불의 제단을 모시고 의식을 하고 있는 장면이 있어 종교적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다.
이 같은 소그드인의 무덤은 약 10여개가 발견되었는데 섬서성뿐만 아니라 감숙성, 하남성, 산서성, 산동성에서도 발견되었다. 이들이 활동한 지역이 동서 무역루트이자 실크로드로 당제국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되는 것이다.
『구당서』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소그드인은 자식을 낳으면 반드시 꿀을 먹이고 손에 아교를 쥐어 준다. 그것은 아이가 성장했을 때 입으로는 항상 꿀처럼 감언을 말하고, 손에 돈이 들어오면
아교처럼 붙어 떨어지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호서(胡書)를 배우며 장사에 능하고 지극히 적은 이익도 다툰다. 남자가 스무살이 되면 장사를 위해 가까운 이웃 나라로 여행을 보내는데, 중
국에도 찾아온다. 이익만 있으면 그들이 가지 않는 곳이 없다.”
신라인 사로잡은 소그드인의 춤사위 이처럼 장사를 숙명처럼 여기고 무엇이든 이익이 된다면 사고 팔며 어디라도 갔던 그들, 중국 동쪽 끝인 산동성 청주(靑州)까지 낙타를 끌고 와서 무역을 했던 그들이 조금 더 동쪽에 있는 나라인 신라에는 관심이 없었을까? 신라의 서역인은 9세기 경주의 원성왕릉과 흥덕왕릉 그리고 구정동 방형분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심목고비(深目高鼻)와 턱수염 그리고 의복 등이 소그드 인을 모델로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실제 신라에 방문한 소그드인을 보고 묘사한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 전래된 소그드인의 모습을 차용하거나 불교의 수호신인 금강역사 이미지의 변용일 뿐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어 논란의 여지가 있다.
이미 전성기가 지난 9세기에 집중되어 나타나는 것도 의문이다. 그러나 최근 오래된 것으로 여겨지는 소그드인의 토용(土俑)이 발견되어 주목된다. 경주 월성 성곽 바깥의 해자에서 발견된 이 토용은 같이 발굴된 목간의 추정연대(526년 또는 586년)에 비추어 6세기의 가장 이른 시기로 추정되는 서역인상이다.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코트 형식의 카프탄 복식을 하고 있고 특이한 형태의 모자와 수염은 소그드인을 묘사한 것으로 보여 진다.
얼굴은 신라의 다른 토우와 마찬가지로 간략하게 묘사하였지만 신체적 특징은 정확하게 포착하였다. 특히 양 갈래로 벌어진 턱수염은 중국에서는 보기 힘든 형식으로 직접 보지 않고 상상으로 묘사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실제로 실크로드상에 있는 베제클릭(Bezeklik) 천불동에는 턱수염이 양갈래로 벌어진 소그드인 공양상이 있다.
이 상이 6세기 것이라면 남북조시대말부터 중국에서 조직적으로 활동한 소그드인이 신라에까지 영역을 넓혔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때부터 신라에 발을 들여 놨다면 지속적으로 교역했음이 당연하다. 신라 하대 최치원이 쓴 「향악잡영」은 『삼국사기』에 전하는 5수의 시로 이 가운데 속독(束毒)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더벅머리 남색얼굴 괴상한 인간들이 떼지어 뜰에 와 난새춤 시늉하네. 북소리 두둥둥 바람은 살랑살랑 남에 닫다 북에 뛰다 두서없이 노니누나.”
속독은 속특(粟特)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며 소그드인의 춤을 묘사한 시로 이들의 춤이 신라악인 향악에 편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비록 신라 하대이지만 소그드인에 대한 인식이 있었고 문화적으로도 영향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유목 민족의 전유물인 양탄자가 외국에 수출되었고 일본 정창원에 보물로 보관될 정도로 신라의 특산물이었다는 사실도 주목해야 한다.
박물관을 돌아보던 중 들려온 어떤 목소리. 그 방향으로 눈길이 돌려진다.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어린 아이들이 일반인을 대상으로 큰소리로 유물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이었다. 학교 숙제인지 아니면 어떤 프로그램의 일환인지는 모르겠으나 결의에 찬 모습으로 막힘없이 술술 이야기하는 것에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경제적으로 발전하는 중국의 모습은 많이 봐서 익숙했지만 자신들의 역사에 대해 어떠한 확신을 불어넣는 중국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본 것이다. 일대일로로 다시 한번 대당제국의 영화를 꿈꾸는 중국몽(中國夢)이 백일몽(白日夢)이 되지 않기 위한 노력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