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뉴스 이동훈 기자] 최근 문재인케어가 의료계의 반대로 난항을 겪으면서, 의약분업 이후 지지부진했던 ‘성분명처방’ 문제가 수면위로 부상할 조짐이다. 약계는 오랜 숙원인 이 제도의 시행이 가시화되기를 기대하고 있지만, 의료계에서는 이 사안에 대해 필사적으로 반기를 들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편집자 주>
대한약사회는 오는 31일부터 4월 1일까지 양일간 대전 유성호텔에서 전국 분회장 및 임원 워크숍을 열고 성분명처방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논의할 예정이다.
이는 문재인케어를 놓고 대립 중인 정부와 대한의사협회의 틈새를 공략한다는 취지로 분석된다.
지난 3월18일 국민건강수호 비상대책위원회는 보건복지부에 예비급여제 시행과 신포괄수가제 시범사업 확대 계획 철회 등 ‘문재인 케어’ 반대 시위를 펼쳤다. 이필수 비대위원장은 “이 조건을 수용하지 않으면 당장 의정 실무협의체 논의부터 중단하겠다”고 예고했다.
상황이 이렇자, 정부 내에서도 의료계와의 협상에 대한 피로감이 커져가고 있는 형편이다. 이런 속에서 튀어나온 단어가 ‘성분명 처방’이다.
정부 내에서 문재인케어 추진을 위한 의료계와의 협상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강해지고 있다. 예고된 건강보험 적자를 줄이기 위한 방편으로 성분명 처방을 염두해고 있는 인사들도 있다는 전언이다.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라는 기치 아래 시작된 의약분업 시행 이후 전문의약품을 조제 받으려면 의사의 진료 후 내린 처방전으로 약사에게 약을 받는 시스템이 정착됐다.
우리나라에서는 현재 약의 성분을 표기하는 성분명 처방과 특정약의 상표를 기입하는 상표명 처방 두 가지 모두 허용되고 있지만, 그 재량은 처방전을 작성하는 의사에게 있다.
◇ 선진국 50년전부터 성분명 처방 정착
반면 선진국을 중심으로 외국에서는 5 0 년 전 부 터 I N N ( I n t e r n a t i o n a l
Nonproprietary Names)이라는 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유럽 등지에서는 제네릭 사용의 활성화 및 환자에 대한 약물정보 제공 등을 위해 성분명 처방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는 분위기다.
영국의 경우 성분명 처방이 전체 79%를 차지하고 있고, 프랑스에서는 제도로서 오리지널에 대응하는 제네릭이 존재하면 통보없이 제네릭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못박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의사들이 대부분 상표명 처방으로 처리하는 것이 고착화돼 성분명 처방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있다.
해외에서는 이미 성능이 입증된 제네릭으로의 대체조제가 가능하고 그것을 권장하고 있으나, 우리나라는 그에 대한 법적지원이 전무한 형편이다.
최근 우리 정부 관계 기관 일부에서도 성분명 처방 시행에 대한 긍정적인 기류가 감지된다.
익명의 한 정부기관 관계자는 “성분명 처방으로 환자의 알권리와 약 선택권이 확장돼 환자의 편익이 증대되고, 같은 성분의 가격이 저렴한 제네릭 의약품을 구입하게 되면 건강보험 재정의 안정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강조했다.
◇ 문재인 케어도 성분명처방도 반대 왜?
의료계의 무조건적인 반대로 정부의 성분명 처방의 본격적 시행은 매번 난항을 겪고 있는 실정이다.
의료계에서는 “생동성 실험을 믿지 못하겠다”라는 이유 등의 몇 가지 명분을 내세우며 반대에 나서고 있는 입장이다. 과거 불거졌던 생물학적 동등성 자료 조작 사건 이 후, 제약회사에 대한 제네릭 허가 제도의 신뢰성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분명 처방을 본격적으로 시행하면 환자의 건강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동성 조작사례가 적발된 이후, 현재 식품의약품안전처의 감사 수준은 크게 높아져 제네릭의 안정성이 보장됐다고 일부 전문가는 보고 있다.
고가의 오리지널 제품과 동일한 효과를 보이고 있는 저가의 제네릭 제품이 병용된다면, 환자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라도 제네릭을 사용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전문가들은 의료계가 성분명 처방에 대해 반대하는 가장 본질적인 이유는 약계와의 주도권 싸움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다.
상표권 처방으로 의사에게 처방권이 전적으로 부여되면서, 지금까지도 큰 이슈가 되고 있는 의사-제약회사 간의 부적절한 리베이트 관행과 상표명 처방을 통해 가질 수 있는 약국에 대한 주도권 등 때문에 이를 반대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한다.
의료계가 성분명 처방에 관한 한 무조건적인 반대 입장을 보이고 있지만, 의사 개별적으로는 원칙적으로 “신뢰할수 있는 양질의 저가 제네릭이 더 많이 사용돼야 한다”는 것에 이견이 없는 상황이다.
◇ 약계 “환자의 부담률 자연스럽게 낮춰져”
의료계와는 상반되게 약계에서는 성분명 처방이 본격 시행되면 처방 후 약에 대한 조제권의 일부를 약사들이 가지게 됨으로써, 완전한 의약분업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정책에 대해 적극 지지하고 있는 입장이다.
정부의 입장 역시 건강보험재정 안정화를 위해 재정 지출이 적은 제네릭으로의 교체가 가능한 성분명 처방에 대해 물밑으로 지지하고 있어, 이 문제에 관한 한 약계와 정부 사이에는 이해관계가 일치하고 있는 상황이다.
약계의 한 관계자는 “성분명처방이 본격 시행되면 동일성분, 동일 효과가 입증된 저렴한 제네릭 약품을 제공함으로써, 환자들의 부담을 낮출 수 있고, 지정된 약국이 아니라 어느 약국에서도 약을 구입할 수 있게 된다”면서 “이미 외국에서도 이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또한 처방권이 전적으로 의사에게 부여된 시스템으로 인해 의사와 제약사간의 리베이트 수수 등의 소지가 여전히 남아있다고 본다.
또 다른 약계 관계자는 “의사들이 오리지널 약품만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이해관계에 따라 제네릭 약품까지 처방하고 있는 현실에서 동일한 원료를 사용한 제네릭의 효과를 믿을 수 없다는 의료계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이러한 리베이트로 독점공급이 이루어지는 제네릭의 경우 오리지널과 비교해 그 가격이 크게 낮지 않은 상태로 공급됨으로써 소비자나 건강보험 재정에 큰 손실을 가한다는 것이다.
과거 일부 제약사들은 전체 기업 이익의 20~25%를 리베이트 비용으로 투입하기도 했다. 그 결과 신약개발이나 공공사업 또는 약가 절감을 위해 투자할 수 있는 자금이 리베이트 쪽으로 유입되는 부작용을 초래했다.
환자들의 입장에서 성분명 처방을 바라봐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환자들의 관점에서 안전하고 믿을 수 있는 오리지널보다 저렴한 제네릭이 있다면 당연히 의사들도 그러한 약을 처방해야 하고, 약사들도 오리지널보다 싼 제네릭을 구입해 약국에 비치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상표명으로 처방할 경우 환자는 의사가 처방한 약만 구입할 수 있지만, 성분명으로 처방할 경우 환자들은 지정된 약국이 아니라 다양한 약국에서 자신이 원하는 약을 사먹을 수 있다.
이에 한 보건의료계 관계자는 “신뢰성을 담보할 수 있는 방법에 의해 검증된 약품에 대한 부분적인 성분명 처방 등 발전적인 방안도 있지만, 의료계는 무조건적으로 반대 입장만을 나타내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