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처녀를 죽인다

2018.12.06 10:29:02

육아의 고단함과 여성적 자아의 상실감을 섬세하게 파헤친 <툴리>



[시사뉴스 정춘옥 기자] 세 아이를 돌보느라 지친 엄마를 구원할 환상적인 보모가 등장한다. 육아의 현실적 고통과 그 시점 여성의 심리적 균열을 흥미롭고 섬세하게 그렸다. <땡큐 포 스모킹> <인 디 에어> <레이버 데이> 등의 제이슨 라이트맨이 연출을 맡았고, <몬스터> <노스 컨츄리>의 샤를리즈 테론이 주연했다.

집 안에서의 고독한 전쟁

챙겨줄 것이 많은 8살 첫째 딸 사라, 발달장애를 앓는 둘째 아들 조나, 그리고 셋째까지 임신한 만삭의 엄마 마를로는 육아에 지쳐서 무기력하고 피곤한 나날을 보낸다.

이런 동생을 안타깝게 여긴 부자 오빠 크레이그는 곧 태어날 셋째의 육아에 대비해 밤에만 와서 아이를 돌보며 잠잘 시간을 만들어주는 야간보모를 제안하며 자신이 비용을 대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마를로는 다른 사람에게 아이를 맡기는 것과 이미 여러차레 받아온 오빠의 도움에 대한 부담감에 내키지 않는다.

셋째가 태어나면서 잠 한숨 잘 수 없는 극한의 상황에 이르고 ‘조금 특별한’ 둘째가 학교에서 재적까지 당하자 마를로는 정신적 육체적으로 한계에 이른다.

자동차 시트를 발로 차며 이상 행동을 보이는 아들과 큰 소리로 울음을 멈추지 않는 갓난 아기, 예민한 첫째 딸에 미칠 지경이다. 하루하루 냉동 피자로 식사를 떼우고 수면부족으로 졸면서 아이를 돌보는 생활에 치여서 옷 갈아입는 것마저 버겁게 느껴진다.

야간 보모 툴리의 등장은 이 같은 상황의 마를로에게 기적을 보여준다. 임신과 육아로 생기를 잃고 뚱뚱한 몸에 지친 얼굴을 한 마를로와는 상반되게 20대의 젊음과 날씬한 몸, 열정이 넘치는 툴리는 우려와는 달리 완벽하게 아이를 돌본다. 정확하게 필요한 것을 알아서 하고, 더 나아가 마를로가 이상적인 엄마라고 생각하지만 육체적 한계로 하지 못했던 청소나 아이들 학교에 가져갈 간식 만들기 등까지 해낸다. 결정적으로, 마를로의 정신적 공허함마저 채워주며 멘토이자 친구가 된다.

“당신을 돌보러 왔어요”

<툴리>는 시각의 섬세함과 연출적 깔끔함이 잘 완성된 영화다. 육아에 대한 스트레스와 피로감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관객의 대리체험을 유도하는 연출로 숨막히는 압박감을 실감나게 표현했다. 엄마라는 이름에게 세상이 당연하게 요구하는 사소한 것들이 얼마나 과도한 것이며 한편으로 비인간적인 것인지도 예리하게 포착했다.

무엇보다 과장이 없다. 남편은 잠자기 전 일정시간 거의 매일 게임에 빠져 있지만 평균 이상의 좋은 아빠다.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아이들도 함께 돌보며 아내에 대한 걱정도 한다. 극한에 있는 아내와 달리 게임이라는 잠깐의 탈출구가 존재한다고 나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육아에 대한 엄마의 역할이란 타자의 짐작을 훌쩍 뛰어넘는 영역이라는 것이 문제다.

아무도, 심지어 자신조차 이해할 수 없는 그 고독하고 우울한 세계를 영화는 툴리라는 인물을 매개로 파헤치
며 위안을 던진다. 그 위안은 현실적인 대안은 아니다. 자신과의 대화를 통한 성숙과 극복 정도일 것이다. 툴리는 20대의 자신이자 일기장이다. 산후 우울증을 앓는 여성, 또는 성적 매력이 없어진 자신을 받아들이기가 힘겨운 중년의 마음을 고백할 수 있는 유일한 친구이자 동지, 정신적 지지자, 철학가다.

자아를 죽이고, 특히 처녀 시절의 자신을 버리고 엄마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축복으로 아무리 미화해도 그 과정은 우울감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영화는 일상적인 산후우울증의 실체를 조망한다. 툴리의 등장으로 달라진
마를로의 ‘사는 것 같은 삶’은 역설적으로 툴리의 부재라는 보통의 중년에게 삶이 얼마나 극한인지를 보여준다. 육아에 지쳐 육아의 즐거움마저 느낄 여유가 없는 그런 삶말이다.

샤를리즈 테론의 깊이 ‘독박 육아’ ‘헬 육아’ 등의 용어들이 등장하고는 있지만, 사랑하는 자녀를 돌보는 일을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과 그런 불만이 엄마의 도리가 아니라는 시각 또한 여전히 존재한다.

마치 노동을 신성시 여기며 ‘산업 역군’으로 아버지에게 채찍질을 가했던 것처럼 모성 신화는 만들어지고 억압적으로 이용된 면 또한 없지 않다. <툴리>는 매끄럽고 자연스럽게, 심지어는 오락성을 갖추면서 모성 신화에 반발한다. 모성은 기꺼이 처녀적 자신을 죽이고 자아를 학대하면서도 끄덕없는 초능력이 아니다. 그리고 감성적인 시선으로 여성 삶의 터닝포인 암흑기를 사색한다.

이 영화의 가장 많은 칭찬은 배우에게 할 수밖에 없다. 샤를리즈 테론이기 때문에 배가 출렁거리는 그 신체의 변화는 더욱 직설적인 감정을 전달한다. 하지만 20kg 넘게 찌운 몸을 노출까지 하며 자신을 내던진 점 이상으로, 노련하고 깊이있는 감정 표현이 인상적이다.

영화는 생략과 절제, 효과적 편집으로 흥미롭게 전개되는 영리한 연출과 더불어 판타지적 결말이나 가족의 소중함 등 의 봉합적 메시지를 거부하는 영리한 주제 의식을 드러낸다. 사실 답은 없지만, 가짜 답은 제시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고 대중성을 넘어선 진보적이거나 혁명적 메시지를 던지는 것은 아니다.
정춘옥 ok337@sisa-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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