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귀신들의 항변 “니들이 내 한을 알아”

2009.09.14 12:09:09


한국의 공포영화에서 가장 흔하게 접하는 귀신은 여자, 그것도 처녀귀신이다.
오랜 기간 큰 인기를 모았던 TV 드라마 <전설의 고향>에서도 처녀귀신은 납량물의 단골로 등장했다. 남자 귀신은 전무하고, 아이와 할머니도 거의 배제된 채 주로 처녀만 귀신으로 등장하는 한국의 공포물.
그럼 어째서 고전극을 소재로 한 한국의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는 귀신은 한결같이 처녀일까. 이를 알아보기 위해선 귀신이 되는 원인부터 찾아봐야 할 것 같다.
자고로 귀신이 되는 원인을 살펴보면 간절한 소원을 이승에서 이루지 못했거나 억울한 피해나 죽음을 당한 것이 대다수다. 과도하게 축적된 스트레스, 바꿔 말해서 한(恨)이 너무나 맺혀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게 된 것이다.
따라서 한국영화에서 처녀귀신이 많이 등장한다는 건 바로 그들이 어느 계층보다 많은 한(恨)을 품었다는 걸 의미한다.
사실 남존여비사상이 고착된 사회에서 여성, 특히 결혼하지 않은 처녀들은 자신의 의견 한번 제대로 주장할 수 없었다. 생각해보라.
결혼하기 전에 한 평생을 의지하고 살아야 할 신랑 얼굴 한번 보지 못했을 때의 강박관념을. 더욱이 기껏 결혼했는데, 신혼 첫날밤에 죽음을 당하거나 혹은 소박을 당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면, 이보다 억울한 일이 없다.
<그림1>
그래서일까? 이러한 소재로 여러 번 방영된 TV 드라마 <전설의 고향>에서는 귀신이 복수할 대상에게 자신의 피맺힌 한을 차분하게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즉 복수 그 자체보다 응어리진 답답한 심정을 해소해야만 한이 다소나마 풀리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점이 서양의 공포물과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부분이다. 서양에 등장하는 공포물의 주인공인 드라큐라를 비롯한 흡혈귀, 늑대인간, 그리고 가장 빠른 시간 내에 살아있는 시체가 되는 좀비, 모두 희생자에게 어째서 자신이 피를 빨아야 하는 지를 설명하지 않고 그럴 필요도 없다. 오직 생존과 피에 대한 갈증과 욕구에서 행동할 뿐이다.
허나 한국의 전통 귀신은 다르다. 처녀귀신도 그렇고 가끔 등장하는 아줌마귀신도 그렇고 심지어 사람이 아닌 구미호도 그러하다.
라스트신에서는 언제나 어째서 이제까지 사람들을 살해했는지를 일목요연하게 얘기한다. 그러한 점에서 한국 귀신이 서양귀신 보다 상대적으로 말은 많지만 정감이 간다.
또한 서양의 흡혈귀를 퇴치하는 방법은 잔인한 반면, 한국의 처녀귀신은 그렇지 않다. 즉 서양에서는 목을 자르거나 말뚝을 가슴에 박기도 하고, 성수를 뿌리면 염산처럼 귀신의 몸이 타들어간다.
그러나 한국은 서양처럼 확실하게 제거하는 게 아니라 한을 달래주는데 포인트가 맞추어져 있다. 즉 차마 죽일 수 없을 정도로 맺힌 한이 너무나 많다.
이건 그만큼 그 여성들이 가정과 사회 가릴 것 없이 온갖 억압과 차별을 받았다는 증거가 된다.
결국 영화나 드라마 할 것 없이 무당이 굿판을 벌이거나 부적을 부쳐주고, 스님의 경 읽는 소리로 귀신을 쫓아 버릴 뿐이다. 그리고 거의 언제나 엔딩은 매해 제사 지내주는 걸로 귀신과 일종의 합의를 본다.
그럼 어째서 한국의 전통 공포물에는 남성이 등장하지 않을까.
사실 '몽달귀신'이라는 총각귀신도 있다. 결혼을 못한 것이 한이 맺혀 귀신이 된 건데, 이러한 한은 우리 사회 구성원이 인정하지 않는다.
즉 처녀귀신의 한에는 공감대가 형성되지만, 이 경우에는 설득을 얻기 보다는 조롱이 뒤따른다. 즉 오죽 못났으면 장가도 못 가느냐 하는 인식이다. 따라서 이런 귀신은 굿도 부적도 필요 없다.
그저 큰 소리로 야! 가! 하면 아무 짓거리도 못하고 물러가는 것이 몽달귀신의 현주소다. 결국 몽달귀신의 경우, 성적 역차별이 발생한다.
한편으로 처녀귀신을 소재로 해서 여러 차례 리메이크한 <장화홍련전>을 통해서, 그 시대의 여성들이 얼마나 소극적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억울하게 죽은 장화와 홍련이 가해자들에게 직접 복수하지 않고 간접적으로 사또에게 도움을 청하는 장면을 들 수 있다. 서양에서는 이런 방식을 취하지 않는다. 이미 죽었으니 더 이상 죽을 위험도 없고 귀신이 돼서 얻은 괴력으로 철저하게 원수를 응징한다.
그러나 장화와 홍련은 가해자를 찾아가지 않고 사또에게 자신들이 어째서 귀신이 됐는지를 설명하는 방식을 취한다. 결국 그러한 과정에서 여러 명의 사또가 사연도 듣기 전에 심장마비로 사망을 한 후, 강심장의 명민한 사또가 원수를 대신 갚아준다.
그런데 이 영화를 거론할 때마다 떠오르는 게 있다. 비록 장화와 홍련은 원수를 갚고 사또 역시 임무를 완수해 승진한 것은 좋은데, 아무 잘못 없이 귀신을 보고 심장마비로 억울하게 비명횡사한 이전 사또들의 원혼은 누가 풀어 줄 지 말이다. 이 역시 몽달귀신에 뒤 이은 또 하나의 성적 역차별인가.


김명완 happyland@sisa-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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