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부, 70년대 초 남북 회담 문서 최초 공개...'이산가족 상봉' 北이 더 적극적

2022.05.04 10:38:38

남북 대화 구체 내용…1/4 비공개 처리
첫 만남 3분 만에 끝나…곳곳서 신경전
北 자유 왕래 vs 南 단계 상봉…태도차

 

[시사뉴스 홍경의 기자] 통일부가 1970년대 초반 남북 회담 문서 일부를 공개했다. 최초 공개된 문서에는 이산가족 상봉 추진을 위한 남북 적십자사 간 접촉 내용이 포함됐다. 지금은 이산가족 상봉에 소극적인 북한이 당시에는 오히려 한국보다 더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 정황이 있다.

 

4일 통일부는 남북회담이 시작된 1970년대 초반 남북 회담 문서 일부(남북대화 사료집 제2・3권, 1970년 8월~1972년 8월, 총 1652쪽)를 일반 국민에게 처음으로 공개했다.

 

정부는 '남북회담 문서 공개에 관한 규정'에 따라 문서 공개를 시작했다. 검토 대상은 생산, 접수 후 30년이 지난 남북회담 문서이며, 기간에 따른 검토 대상은 1971년부터 1991년까지 문서들인데 올해는 1981년 이전 생산·접수 문서들이 우선 공개된다.

 

이번 공개는 시범 성격이라는 게 통일부 측 설명이다. 문서 1652쪽 가운데 418쪽은 비공개 됐으며, 대상 기간인 1972년 '7·4남북공동성명'과 관련한 남북 물밑 접촉 내용은 담기지 않았다.

 

다만 향후 공개 과정에서는 해당 내용들이 포함될 것으로 보인다. 통일부 당국자는 "회의록이 최초 공개된다는 차원에서 의미가 있다"며 "사후적으로 공개할 수 있는 내용들은 추가 공개할 예정"이라고 했다.

 

이번 공개 문서에는 분단 이후 남북 대화 첫 문을 연 남북 적십자 파견원 접촉부터 25차례에 걸친 남북 적십자 예비회담까지 진행 과정이 포함됐다. 사상 첫 남북 대표 만남, 남북 적십자 예비회담 진행 절차에 대한 합의 과정, 다섯 가지 남북 의제에 대한 최초 합의 등이 담겼다.

 

남북 대표들의 첫 만남은 1971년 8월20일 이뤄졌다. 1차 파견원 접촉은 "안녕하십니까"란 인사말과 함께 3분 만에 끝났는데 비교적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양측은 상호 소개 후 회담을 제의하는 문서를 주고받는 수준에서 대화를 끝냈다. 우리 측은 "수해가 많이 안졌느냐"고 물으면서 대화를 이어가려 했는데 북측은 "수해가 없었다"고 한 뒤 연신 "우리 임무는 이것으로 끝났다고 본다"고 했다.

 

이후 이어진 파견원 접촉, 예비회담에선 분위기가 다소 개선되는 모습을 보이고 했지만 적잖은 지점에서 양측이 신경전을 벌이는 듯한 모습이 전개되기도 했다.

 

차기 회담 일시 결정, 호칭 문제, 장소 문제, 의제와 문구, 방향성 등에서 대립하는 모습이 있었다. 분위기가 과열되는 때엔 '담배'를 언급하면서 전환을 꾀하는 모습도 관측된다.

 

1971년 11월3일 판문점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에서 열린 예비회담 당시 남북 적십자 대표가 주고받은 대화는 당시 분위기를 대변한다.

 

북한은 시종일관 조속한 이산가족 상봉을 촉구했다. 그러면서 북한은 이산가족의 자유로운 남북한 왕래와 서신 교환을 요구했다. 이는 현재 이산가족 상봉 요구에 일절 응하지 않고 있는 북한의 태도와는 대조적이다.

 

북한 측 대표는 "같은 민족끼리, 더욱이 한 핏줄을 이은 가족과 친척, 친우들끼리 만나고 자유로이 오고가는데 무슨 복잡한 절차와 수속이 필요하겠냐"며 "남북으로 흩어진 가족들과 친척, 친우들끼리 자유로이 편지를 주고받고 오고가는 데 아무런 방해도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평양에서 기차를 타면 하루면 남녘의 어디나 닿을 수 있는 고향땅, 고향집을 찾을 수 있는 우리나라 조건에서 흩어진 가족들과 친척, 친우들이 마음대로 오고갈 수 없다는 것은 전혀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라며 "지금도 공화국 북반부에는 재일동포들의 조국 방문단이 오가고 있다. 그들은 아무런 제약도 없이 마음대로 자기 가족들과 친척, 친우들과 만나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밝혔다.

 

북 측 대표는 이어 "이렇게 멀리 이역만리에서 와서 자기 동포들끼리 한자리에 모여 사는 숭고한 경험과 전례가 있는데 서로 지척에 두고 있는 남북의 부모, 형제, 자매, 친척, 친우들끼리 자유롭게 다니지 못할 하등의 근거가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제 자유롭게 가라, 너 가서 찾아라, 상봉을 하고 또 가족 해결이라도 해라, 무슨 생신날이니까 가봐라, 이렇게 방해하는 그 어떠한 요소를 우리가 적십자의 힘으로 해결해준다면 어디든지 찾아갈 수 있는 그런 지혜를 갖고 있다"며 "우리 민족이 그렇게 자기 고향집도 자기 고향땅도 찾아가지 못할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북 측 대표는 그러면서 "당신 측은 우선 이산가족의 생사와 소재를 확인하고 그들의 소식을 알려주는 문제가 가장 긴급한 문제라고 하면서 남북으로 흩어진 가족들과 친척, 친우들의 자유로운 왕래 문제를 외면하고 있다"고 한국 측을 비난했다.

 

이에 대한적십자사는 예비회담 내내 단계적인 상봉을 주장하며 북측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단 이산가족 생사 확인부터 한 뒤 이후 사업을 확대하자는 게 한국 측 입장이었다.

 

한국 측 대표는 "남북으로 흩어져있는 1000만 이산가족을 찾아주고 서신을 주고받게 해줄 뿐만 아니라 상호 방문과 재결합까지 실현시키는 일은 거대한 사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며 "사업의 범위를 이보다 넓힌다면 오히려 중점을 잃어 가장 긴급하고 가장 중요한 가족 찾기 운동마저 소기의 성과를 거두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오래간만에 처음으로 열린 남북적심자회담에서 순서 없이 많은 일을 벌여놓는다면 이는 무리일 뿐만 아니라 모처럼 마련된 남북 적십자 간의 협조정신에 부정적 영향이 미칠지도 모른다고 염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측 대표는 "남북으로 흩어져 서로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또는 살았어도 어디에 살고 있는지도 모르는 차제에 서로 어디를 오고간다는 것이냐"며 "자유 왕래가 모든 것에 앞서야 될 선결 조건이라는 귀측의 제안은 차례를 뒤바꾼 전혀 타당하지 않은 것이며 가족 찾기 사업의 시작과 끝을 뒤바꾼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처럼 1971년 8월12일 대한적십자사 최두선 총재의 제안으로 남북 적십자 회담이 시작됐지만 북한은 예비회담 단계부터 거듭 자유 왕래를 요구했다. 북한의 이 같은 태도는 적십자 회담과 이산가족 상봉을 통해 한국 내 반공 체제를 약화시키고 통일 전선을 구축하려는 것으로 풀이됐다. 당시는 김신조를 포함한 북측 무장 공비가 청와대 기습을 시도한 1·21 사태가 발생한 지 3년여가 지난 시점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당시 박정희 정권으로서는 간첩 유입 우려를 배제할 수 없는 자유 왕래 방식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측면이 있었다. 

 

예비회담은 1972년 6월에야 성과를 냈다. 예비회담 19회와 의제 문안 실무 회의 13회를 거쳐 남북 적십자 본회담에서 논의할 의제 5개항이 채택됐다. 5개항은 이산가족 주소와 생사 확인, 자유로운 방문과 상봉, 자유로운 서신 교환, 자유의사에 의한 재결합, 기타 인도적 문제 해결 등이다.

 

본 회담은 1972년 8월부터 열렸다. 본 회담은 서울과 평양에서 번갈아가며 7회에 걸쳐 열렸지만 북한이 한국의 법률적 조건과 사회적 환경을 개선해야 한다는 등 정치적 문제를 거론하면서 또다시 협상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그러던 북한은 1973년 8월28일 본 회담마저 중단시켰다.

 

적십자 회담을 거부하던 북한은 1984년 대남 수재 물자 인도 인수가 끝난 직후 본 회담을 속개하자는 한국 측 제의에 호응했다. 이로써 중단된 지 12년 만인 1985년 5월 제8차 본 회담이 재개됐다.

 

이때도 북한은 통일 전선 논리에 입각한 자유 왕래를 주장했지만 결국 남북한 시범 사업으로 이산가족 고향 방문단 교환과 예술 공연단 교환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1985년 9월20일부터 23일까지 분단 40년 만에 처음으로 서울과 평양에서 이산가족과 예술 공연단의 동시 교환 방문이 이뤄졌다.

홍경의 tkhong1@hanmail.net
Copyright @2024 SISA NEWS All rights reserved.
시사뉴스의 모든 컨텐츠를 무단복제 사용할 경우에는 저작권 법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서울] (05510) 서울 송파구 올림픽로35가길11 (신천동) 한신빌딩 10층 TEL : (02)412-3228~9 | FAX : (02) 412-1425
창간발행인 겸 편집인 회장 강신한 | 대표 박성태 | 개인정보책임자 이경숙 | 청소년보호책임자 박정민 l 등록번호 : 서울 아,00280 | 등록일 : 2006-11-3 | 발행일 : 2006-11-3
Copyright ⓒ 1989 - 2024 SISA NEWS All rights reserved. Contact webmaster@sisa-news.com for more information
시사뉴스의 모든 컨텐츠를 무단복제 사용할 경우에는 저작권 법에 의해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