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괴는 때로 건설보다 건강하다

2016.07.18 11:35:27

일상을 상실한 남자의 파격적 상처치유법 ‘데몰리션’


[시사뉴스 정춘옥 기자] 아내를 잃은 한 남자의 심리적 내면을 섬세하게 그렸다. ‘와일드’ ‘달라스 바이어스 클
럽’ 등으로 알려진 장 마크 발레의 신작. 제이크 질렌할, 나오미 왓츠가 출연했다. 제 40회 토론토 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아내의 죽음, 눈물이 나지 않는다


성공한 투자분석가 데이비스는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아내 줄리아를 잃는다. 아내 사망 소식을 듣고 우두커니 병원에 앉아있던 데이비스는 배고픔을 느끼고 과자 자판기에서 초콜릿을 구매하려 한다. 하지만 포장지가 걸려 나오지 않는 초콜릿에 화가 난다. 아내의 장례식장에서도 눈물이 나지 않는 데이비스는 엉뚱하게도 자판기 회사에 편지를 쓴다. 환불을 요청하는 클레임의 정당성을 뒷받침한다는 명분으로 데이비스는 아내의 죽음과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고백, 아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모르겠다는 사연을 구구절절하게 편지에 써서 보낸다.
다음날 아무렇지도 않게 회사에 출근한 데이비스를 보고 직원들은 수군거린다. 비서가 위로를 하려하지만 데이비스는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사무적인 이야기만 할뿐이다. 데이비드가 다니는 회사의 사장이기도한 장인은 딸을 잃은 슬픔을 그와 공유하려하지만 그는 슬픔을 공
감하지 못한다. 문득 죽기 전 아내가 차안에서 모든 것에 무심한 그를 책망하며 냉장고를 고쳐 달라고 요청했던 것이 생각난 데이비스.
“뭔가를 고치려면 전부 분해한 다음 중요한 게 뭔지 알아내야 돼”기계치인 그를 위한 장인의 충고도 떠오른다. 냉장고를 산산조각으로 분해한 새벽 2시, 자판기회사 고객센터 직원이라며 캐런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편지를 읽고 그의 슬픔에 마음이 움직인 캐런과 그렇게 인연이 시작된다. 캐런또한 미래를 약속한 좋은 남자친구가 있지만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그녀의 아들 크리스의 삶도 불안정하다. 자신이 누구인지, 진짜 자신을 표현해도 되는지 어려움을 겪는 사춘기 소년이다. 데이비스는 캐런과 남녀관계가 아닌 인간적인 교감을 느끼며 이상한 동거를 시작한다. 그리고 냉장고에서부터 시작된 데이비스의 해체와 파괴는 점차 확장된다. 회사 컴퓨터, 화장실 문짝을 부수던 그는 재건축 인부들에게 돈까지 주면서 집을 부수는 작업에 동참한다. 그리고 크리스와 함께 아내와 함께 살던 자신의 집을 산산조각 낸다.


상류층 주류적 삶의 허구성


배우자의 죽음이란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것 그 이상, 일상을 잃는 것이다. 무심했던 일상의 작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일상의 중심을 잃고 균열을 경험했을 때다. 표면적 스토리는 아내를 잃은 주인공의 심리와 사랑을 깨닫고 치유한다는 단순한 내용이지만 그 방법이 파괴라는 것은 파격적이다.
‘와일드’,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 등 전작에서도 상실과 치유에 탁월한 감성을 보여줬던 장 마크 발레 감독은 뛰어난 연출력으로 심리를 섬세하게 표현한다. 주변인들의 오열과 위로가 유리창 밖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느껴진다거나, 직접적인 대사나 설정 없이도 그 넓고 멋진 집에서 무덤덤하게 살아가는 남자의 모습이 한없이 고독하고 공허하게 보이는 것은 연출의 힘이다. 무표정하게 일상을 살고 마구잡이 부수는 작업에 몰두하는 남자의 모습은 아내와의 추억을 떠올리고 흐느끼는 식의 상투적 장면보다 더 깊은 상처를 공감하게 한다.
흥미로운 점은 전반에 계층 대립적인 요소가 명확하다는 것이다. 일상의 균열은 데이비스의 성공과 부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데이비스는 장인과 공감하지 못하지만 비주류 계층인 캐런과 크리스와는 소통한다. 이전에는 말조차 섞고 싶지 않았던 하층 계급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도 한다. 출근을 하지 않고 양복을 입지 않으며 수염도 다듬지 않는 삶은 껍데기만 남은 자신의 삶을 깨부수는 작업이다. 상실은 그에게 본질을 다시 보는 깨달음을 준 것이다.
일상의 공간을 해머로 깨부수는 데이비스의 행동은 딸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장학재단을 만드는 장인과는 대조적인 상처 치유 방식이다. 상류층의 우아함과 설립과 건설이라는 주류적 행동을 상징하는 장인의 장학 사업이 가진 허구성을 후반부에서 가볍지만 강렬하게 드러냄으로써 데이비스의 파괴적 행동이 오히려 진정한 치유법이며, 보다 삶의 본질에 가까운 것일 수 있다는 메시지를 강조한다.
크리스 또한 폭행을 당하면서도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해방감을 느낀다. 자신을 알기 위해, 진짜 자신을 찾기 위한 크리스의 자기 파괴는 데이비스와 일맥상통한다. 파괴는 때로 건설보다 건강하다.
이 해괴한 논리가 자연스럽고 잔잔하게 설득되는 영화다. 연출만큼이나 배우들의 연기도 모두인상적이다. 주인공의 연기가 비중을 많이 차지하는 영화인데 제이크 질렌할은 기대만큼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다. 캐런역의 나오미 왓츠의 매력도 새롭다. 장인역을 맡은 크리스 쿠퍼의 연기 또한 상당한 수준이다. 무엇보다 음악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정춘옥 ok337@sisa-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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