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포칼립토>, 마야문명을 제대로 재현했나?

2007.09.14 16:07:55

연동원 - 영화평론가, 延 영상문화연구소장

콜럼부스의 신대륙(?) 발견 이후 유럽인의 침략에 의해 멸망되기 이전, 아메리카대륙에는 찬란한 문명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세계 10대 문명으로 손꼽히는 마야와 잉카 그리고 아스텍을 두고 한 말이다. 그러나 대개의 일반인에게는 이들 문명이 대체 어디에서 일어났으며 어떠한 특성과 차이점이 있는지 관심조차 없다. 하긴 대학에서 10여 년 이상 역사학을 가르쳐 온 필자 역시 빡빡한 강의 일정 속에서 아메리카나 아프리카 지역은 언제나 논외(論外)의 대상이 되곤 했다.

그러나 이렇듯 소외된 이들 문명 지역이 2007년 초 갑자기 세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바로 배우이자 감독인 멜 깁슨의 <아포칼립토>가 전 세계 영화팬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요즈음 국내 TV 방송사가 고구려와 낙랑, 고려를 소재로 한 역사드라마 제작으로 인해, 시청자들이 이제껏 잊고 지냈던 조선시대 이외의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부쩍 관심을 가진 것과 유사하다.

<아포칼립토>의 개략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평화로이 살아가는 마을이 마야 전사들의 습격으로 초토화되고 그러한 어수선한 상황에서 주인공 ‘표범 발’은 임신한 아내와 어린 아들을 깊은 구덩이 밑에 숨겨 놓는다. 이웃 주민들과 함께 마야의 신전으로 끌려간 ‘표범 발’은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와 고향으로 도망친다.

자기 목숨보다 소중한 아내와 아들을 구덩이로부터 빼내야 한다는 일념 밖에 없는 ‘표범 발’과 그를 쫓는 마야의 전사들. ‘표범 발’은 뛰어난 기지로 이들을 하나씩 제거하지만, 결국 큰 부상을 입어 더 이상 피할 곳도 없게 된다. 바로 그때, 근처 바다에서 백인 무리가 상륙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넋이 나간 주인공과 마야 전사들. 불길한 예감이 현실로 닥친 것이다.

영화 타이틀 아포칼립토(APOCALYPTO)는 그리스어로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이 단어는 언뜻 보면 마지막 장면에서 표범 발의 대사를 연상하게 한다. 마야인을 피하기 위해 백인에게 가는 게 어떠한 지를 묻는 아내를 향해 그는 말하길,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 가야 해”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아포칼립토는 비극의 언어가 되기도 한다. 영화의 주무대인 마야를 비롯한 아메리카문명 전체가 유럽인의 침입으로 철저히 파괴되는 시점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아포칼립토>가 개봉되자, 일부 관객과 비평가들은 서로 엇갈린 견해를 피력했다. 한쪽에서는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역사적 재현에 충실하고 한시도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스릴 넘치는 영화라고 격찬하는 가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너무 폭력적이고 유혈이 낭자하며 마야문명의 멸망 원인이 마치 산 제물을 바친데 따른 하늘의 응징처럼 비쳐진다고 했다. 즉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니, 백인의 침략을 당하지”라는 개연성을 갖게 한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아포칼립토>가 멜 깁슨의 전작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와 일맥상통한다는 것이다. 전작 역시 시종일관 온갖 폭력이 여과 없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많은 논란이 뒤따랐다. 속칭 ‘기독교’라는 무늬만 빌려왔지 잔인한 장면이 너무 많아 일명 ‘하드코어급 공포영화’라는 말들도 오갔다. 또한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는 역사적 고증에 심혈을 기울였을 뿐만 아니라 영어 대사가 아닌 그 시대 현지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마야어를 대사로 한 <아포칼립토>와 공통점이 있다. 더욱이 멜 깁슨은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개봉시 유대교를 비하했다고 해서 도마 위에 올랐던 것처럼, <아포칼립토> 역시 마야문명의 야만성을 고발하고 유럽인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펼쳤다는 비난에 직면했다.

그럼 일부에서 제기하는 것처럼, <아포칼립토>는 유럽인의 침략을 정당화하는 의미를 담고 있을까? 물론 이러한 해답은 제작까지 겸한 멜 깁슨의 의중에 있겠지만, 오해의 소지를 불러 온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위대한 문명은 내부에서 스스로 멸망하기 전까지는 결코 정복당하지 않는다”는 자막을 시작으로 영화가 전개되기 때문이다. 프롤로그의 자막은 영화 전체의 의미를 함축한 것으로 볼 만큼 중요하다. 아놀드 토인비의 문명사관에도 "문명의 붕괴는 외부적인 요소 이전에 내부의 모순과 쇠퇴가 주된 요인"이라고 밝히고 있는 바, 이러한 표현은 어찌 보면 설득력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영화에 국한한다면, 멜 깁슨의 시각은 편견에 사로잡혔다고 지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볼 때, 마야는 영화의 무대 훨씬 전인 기원후 3백년부터 신관에 의해 지배되었으며, 산 제물이라는 미명하에 많은 사람들이 무참하게 도륙되었다. 그리고 영화 속에 보이는 야만적이고 광기어린 행위와는 대조적으로 당시 마야문명은 뛰어난 수학을 바탕으로 한 세계 최고 수준의 천문학을 보유하고 있었다. 더욱 중요한 점은 ‘표범 발’이 살던 숲속 주민들이 마야인들에게 억울하게 희생된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마야를 비롯한 아스텍과 잉카문명이 ‘기독교의 전도’라는 미명 하에 백인들에게 철저히 파괴되었다는 사실이다. 포로로 잡힌 잉카의 왕 아타후알파는 엄청난 몸값을 지불했음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기독교인으로 개종되고 화형 당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영화가 인종차별적인 시각을 견지했다는 해석을 단순한 비약으로 볼 수도 있다. 이유인즉 <아포칼립토>는 마야 문화와 생활상을 소재로 한 순수한(?) 상업영화의 틀 속에서 이해되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잔인한 장면은 배를 갈라 심장을 꺼내고 휘두르는 도끼에 머리가 잘려 나가는 대목이다. 분명한 점은 당시 마야 벽화에도 영화와 별반 차이가 없는 똑 같은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고증을 바탕으로 한 사실적인 폭력이 관객을 흡인하는 주요 동인으로 작용한다.

추적 영화의 틀을 따르는 이 영화는 자극적이고 숨 돌릴 틈 없이 긴박하게 진행된다. 그렇다면 ‘흥행’과 ‘비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쫓는 입장에서 볼 때, 이 영화는 이미 한 마리는 잡은 것 같다. 그리고 관객들에게 마야문명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했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마치 임권택이 <취화선>을 통해서 장승업이라는 인물을 세상 사람들에게 각인시킨 것처럼 말이다.

마야문명은 1525년에 구아테말라가, 1541년에 유카탄이 정복당함으로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흔히 역사는 승리자에 의해 쓰여진다고 하는데, 영화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아포칼립토> 역시 할리우드의 거대 자본과 첨단 기술력 그리고 멜 깁슨의 뛰어난 상업적 감각의 합작품이란 걸 염두한 것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결코 부정적으로 보진 않는다. 폄하하기에는 마야문명의 이미지가 강렬할 정도로 사실적으로 그려지고 있고 탄성을 자아낼만한 멋진 장면이 연이어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참으로 오랜만에 서구문명이 아닌 아메리카 원주민이 무대의 중심인물로 스크린에서 활약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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