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용지물’의 유용함

2006.03.31 09:03:03

모든 것은 바로 눈앞에 있다. 우리는 손만 뻗으면 된다.” 김중혁의 소설 ‘무용지물 박물관’ 에서 사물들을 말로써 스케치해 시각장애인들에게 들려주는 ‘메이비’라는 디제이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적어 놓은 문구다. 에펠탑과 암스테르담, 쉬폴 공항과 보잉 707기, 잠수함 등을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주는 디제이가 등장하는 이 소설은 김중혁식 소설 세계의 깊숙한 근간을 드러내는 작품이다.

사소해서 지나치는 사물들
2000년 ‘문학과사회’에 동명의 중편을 발표하며 등단한 김중혁은 그동안 사물의 해방을 통해 인간의 해방을 꿈꾸는 그만의 유토피아를 꾸준히 그려보였다. 김중혁은 그의 ‘상상력이 작동하는 방식이 한국 문학의 새로운 방향을 암시하고 있다’는 평과 함께, ‘문학의 오래된 미래’를 보여준다, 사물들과 인간에게 모두 ‘이상향인 그런 장소’에 대해 고민한다는 평을 받아왔다.
곧 우리 눈앞에 언제나 흔하게 있지만, 너무 사소해 냥 지나치기 일쑤인 사물들에 대한 관심과, 낡고 소용가치가 떨어져 사람들에게 잊혀진 구시대의 유물들에 대한 애착이 그의 소설 세계를 이뤄내는 거점이다.
눈뜬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잠수함의 형태. 그러나 우리는 눈을 뜨고 있다는 이유로, 너무나 많은 사물들을 그저 시신경을 통과해 뇌 밖으로 흘려버리고 만다. 작가는 이러한 사물들에 일일이 손을 뻗어 우리의 눈앞에 가져다준다. 60년대를 풍미한 밴드 ‘비틀즈’의 노래에 나오는 노란 잠수함에 대한 ‘메이비’의 세세한 묘사는 모든 것이 단순논리로 해명되는 디지털 시대를 사는 우리가 잊고 살았던 추억의 산물들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다음은 본문 중에 ‘메이비의 라디오’라는 장에 있는 ‘메이비’의 방송 내용이며, 이 방송의 제목이 바로 ‘무용지물 박물관’이다.

박물관의 오래된 소장품
‘작은 디자인, 적은 디자인’을 표방하는 디자이너인 ‘나’는 ‘메이비’의 라디오 방송을 듣고 그야말로 최고의 디자이너라고 생각한다. 완성돼 제품이 출시되는 순간 이미 낡은 것이 돼버리는 소위 디자인의 생명, 또는 가치에 대한 고민을 안고 있는 ‘나’이기에 갖가지 사물에 대한 묘사를 모아둔 ‘무용지물 박물관’의 소장품들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소중한, 그리고 유용한 디자인이다.
작가의 페르소나라고 보아도 무방할 ‘메이비’와 그의 ‘박물관’은 김중혁이 그간 써온 소설들과 닮아 있다. 이 작가의 앞으로의 작업에 대한 설계도쯤 된다고 할 수 있다. ‘바나나 주식회사’의 열쇠와 연필, ‘회색 괴물’의 타자기와 ‘FOF’의 상품들, ‘에스키모, 여기가 끝이야’의 지도 제작용 도구들, ‘발명가 이눅씨의 설계도’에서 이눅씨가 만들어내는 발명품들은 모두 김중혁이 해방시킨 사물들이다. 그의 이러한 ‘해방’의 작업은 ‘무용지물’인 것만은 아닐 것이다.

정춘옥 ok337@sisa-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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