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사회의 복제인간들

2006.10.20 13:10:10

내가 나임을 증명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가 너와 다르다’는 점이 내가 살아 있는 증거가 되는 것이라면 나와 똑같은 사람이 나타난다면 어떻게 될까? 포르투갈의 역사에서 인간과 사회, 문명에 대한 통찰력 있는 작품을 펴내고 있는 노벨상 수상작가 주제 사라마구는 자신과 똑같은 대상과 마주하게 되는 도플갱어라는 모티프를 가지고 그 특유의 이야기 실력을 뽐내며 우리에게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무엇 때문에 나인가’를 묻는다.

비디오에 자신이 등장하다
인구 500만의 대도시에서 평범하고 평범한 중학교 역사교사 테르툴리아노 막시모 아폰소는 어느 날 동료교사의 추천으로 비디오 한편을 빌려보다 믿을 수 없는 장면을 본다. 자신의 5년 전 모습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평범할 수 없게 된 막시모는 그 단역배우에 대한 집요한 추적을 벌이게 되고 그 배우가 어디 사는지, 그의 본명이 무엇인지 알아내 결국엔 배우와 그 부인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린다.
막시모는 어머니 앞에서 자신의 비밀과 고민을 털어놓으며 짓누르던 불안감을 벗어나고 여자친구 마리아와의 결혼을 결심한 반면, 배우인 안토니오 클라로는 자신의 삶을 침범한 막시모에 대한 복수로 마리아 앞에서 막시모의 행세를 하며 그녀를 범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막시모는 아무것도 모르는 마리아를 속여 클라로에 대한 정보를 캐낸 바 있기에 어쩔 수 없이 그의 계획에 끌려가다가 자신도 클라로 행세를 하며 그의 부인 헬레나에게 똑같은 일을 저지른다.

익명성과 몰개성
마르케스, 보르헤스와 함께 20세기 세계문학의 거장으로 꼽히는 사라마구는 환상적 리얼리즘 안에서도 개인과 역사, 현실과 허구를 가로지르며 우화적 비유와 신랄한 풍자, 경계 없는 상상력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문학세계를 구축해 왔다. 여든넷의 나이가 무색할 만큼 왕성한 그의 창작 활동은 세계의 수많은 작가를 고무하고 독자를 매료시키며 작가정신의 살아있는 표본으로 불리고 있다.
이 소설에서도 사라마구는 특유의 감각으로 현대 대도시의 익명성과 자본주의가 가져오는 몰개성을 개인의 죽음으로 은유하고 있다. 남들과 달라 보이기 위해 유행을 따르면서 비슷해지는 사람들, 복제인간들처럼 비슷해지는 성형수술 미인들, 정견 없는 정치인들…. 우리 또한 개성과 개인의 죽음을 수도 없이 목격하고 산다. 생물학적 죽음은 아니더라도 사회적 문화적 정치학적 죽음을 말이다. 내가 너와 다른 점을 찾을 수 없는 수많은 도플갱어들이 서로에게 죽음을 예고하고 있다는 것이 사라마구의 메시지다.

정춘옥 ok337@sisa-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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