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인 살인사건 (제1회)

2006.12.01 17:12:12

한유림
1941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1973년 KBS드라마 공모에서 <청자빛은 왜 푸른가>가 당선, 방송드라마 <형사>,<목격자>,<여인극장>,<돌풍>,<독립운동사>,<경제실록 50년>등을 썼다.
그 외 <유정>,<하와이 연정>,<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안개도시> 등 30여편의 시나리오를 썼으며 1985년에는 매일경제신문 공모 2천만원 고료 기업소설 <거대한 유산>이 당선되었고 <종합상사>,<소설 현대그룹>,<소설 대우그룹>, 재벌 총수들의 젊은 시절을 다룬 <세계는 꿈꾸는 자의 것이다> 등의 기업소설을 펴내기도 했다.
추리소설로는 <여자는 한번 사랑한다>,<욕망의 살인사건>등이 있으며 현재 <시사신문>지에 <동해물과 백두산이>를 연재중이다.
정 사
남자의 손이 흡사 흡반처럼 움직였다. 불룩한 여자의 구릉지대가 꿈틀했다. 커다란 신음이 새어 나온다. 그런데도 남자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먹이를 지치게 해놓고 완상(玩賞)하는 늙은 맹수처럼 남자는 여자의 피부를 서서히 쓸며 손바닥의 감촉을 즐기고 있었다.
“아이, 이리 오세요.”
여자의 교성이 아니더라도 방안은 후끈한 열기로 꽉 찼다. 적당히 냉방을 해놓은 방인데도 짙은 땀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하늘거리는 커튼 사이로 한여름의 따가운 햇볕이 스며들어 왔다. 어디선가 구구구 비둘기 소리가 들렸다.
도시는 비어 있었다. 모두들 피서행락을 떠나 버리고, 도시의 뒷골목에 남아 있는 서민들의 찌든 얼굴에는 삶에 지친 체념이 드리워져 있었다. 간간이 자동차의 클랙슨 소리가 들리는 걸로 봐서 이 저택은 큰 길에서 그다지 떨어져 있는 것 같지가 않았다.
여자는 점차 비등점에 도달하고 있었다. 온 몸이 활처럼 휘어져 남자의 몸을 뿌리치듯 허공으로 내밀고 있었다.
“제발… 어서 오시라니깐요.”
남자는 실눈을 떴다. 여자의 피부가 비로드 위에 떨어지는 물방울같이 윤기를 발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남자는 완상을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서 여자의 은밀한 비처를 쓸어내리고 있었다.
여자는 서른 일곱 살쯤 돼 보였다. 수밀도처럼 익어있었다. 흑단 같은 머리채가 너무나 고왔다. 눈썹마저 길고 검었다. 그 눈썹이 파르르 떨고 있었다.
지지 않는 욕망 때문에 여자는 갈증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입술이 메말라오고 입에서는 단내가 확 풍겼다.
어딘지 어울리지 않는 정사였다. 남자는 벌써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였다. 왜 이들은 텅빈 도시에서 이런 언밸런스한 게임을 즐기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게임이라고밖엔 볼 수가 없었다. 동상이몽(同床異夢)이었다.
여자의 몸부림이 거세어지면 거세어질수록 노인은 착 가라앉았다. 그 표정에 백자 항아리를 감상하듯 차거운 기운마저 감돌았다.
노인은 여자의 지체를 소중하게 두 손으로 감싸쥐고, 광인처럼 완만한 곡선을 들여다보다가 그곳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여자의 몸이 전기에 닿은 것처럼 움찔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아무리 뜯어봐도 알 수가 없었다. 부부도 아니요, 그렇다고 연인 사이도 아닌 것 같았다. 젊은 여체 모델을 산 늙은 화가일 리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게임을 멈추지 않았다. 지루할 정도로 시간이 흘러갔다. 여자의 표정은 이젠 짜증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멍하니 허공을 보는 눈이 초점을 잃고 있었다.
노인은 불능자인가? 꺼져가는 생명의 불을 젊은 여인의 살갗에서 찾으려는 것일까? 그의 눈은 번들거렸다. 광맥을 찾아 헤매는 광부처럼 여자의 이곳저곳을 더듬고 있었다.
그렇다. 더듬는다는 표현이 가장 적합했다. 노인의 메마른 손가락은 흡반달린 문어처럼 꿈틀거리고 있었다.
이제는 여자 쪽이 냉정을 찾기 시작했다. 숨소리마저 고르고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어떤 계약 속에서 이들은 이런 의식을 치르는가?
돈일까? 사랑일까? 아니면 연민의 정일까?
밖에서 비둘기의 날갯짓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는 지루했던 여름해도 창에서 비끼고 있었다.
그래도 노인은 동작을 멈추지 않았다. 처절할 정도로 젊은 육체에 매달려 있었다. 안간힘으로 노인은 젊고 팽팽한 살갗에서 무언가를 구하고 있었다. 아니 갈구하고 있었다.
(나도 젊었을 때는 이랬어… )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젊었을 때의 정사를 그리는가?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노인은 생의 마지막을 연장해 보려고 버둥대는 것일까?
여자는 처량하리만치 미인이었다. 몸매도 나무랄 데가 없었다. 발가락도 손가락도 모두 투명하리만치 고르고 예뻤다. 그런데도 노인의 게임에 온몸을 맡기고 있었다.
“이제 그만 하세요.”
여자가 참다 못해 내뱉었다. 벌써 방안은 어둑해 오고 있었다. 노인은 손가락의 동작을 멈췄다. 그 눈이 장남감을 뺏긴 아이처럼 풀이 죽어 있었다.
여자는 고양이처럼 일어났다. 욕실로 가는 여인의 다리가 하얗다. 쏴아-하고 시원한 물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
노인은 침대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가래가 끓어오르는 듯 목이 그렁그렁 했다. 이윽고 그는 상체를 일으켜 타구에 가래를 탁 뱉었다.
정사의 찌꺼기처럼 가래는 타구에 묻어났다. 그걸 들여다보면서 노인은 인간의 오공에서 나오는 액체는 다 더럽다고 한 불타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젠 회사로 나가셔야죠?”
여자가 가운을 걸친 채 긴 머리채에 빗질을 하면서 중얼거렸다. 날이 이미 어두웠는데 회사란다. 여자는 자상한 누이처럼 노인의 몸에 옷을 걸쳐주었다. 양말도 신겨주었다. 헤어질 때가 온 모양이었다.
노인은 인색한 유태인처럼 여자를 바라봤다. 노인은 지갑에서 수표 몇 장을 집히는 대로 꺼내서 여자의 침대머리에 놓았다. 그리고 여자가 신겨주는 구두를 신었다. 노인의 복장이 범상치 않았다. 기품이 있어 보였다. 잠시 후 노인은 방을 나가고 여자는 멍히 방안에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무척이나 더운 날이었다. 포장도로가 지글지글 끓고 있었다. 서울시민은 모조리 피서를 떠나 버리고, 상점은 철시를 한 채 도시는 텅 비다시피 했다. 본격적인 삼복더위가 덮친 것이다.
8월10일 오후 6시쯤. 서울 우이동 860번지 우일산업 백낙원 사장댁에 승용차가 한 대 미끄러지듯이 와 멎었다.
언뜻 보면 별장처럼 보이는 이 저택은 인가와는 뚝 떨어져 있었다. 육중한 담에 덩굴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호, 그 꽃향기 한번 좋다.”
검은 진찰가방을 들고 차에서 내려 선 신사는 철대문을 열어주는 이집 가정부에게 말을 던졌다.
“백사장 좀 어떤가?”
“어서 오세요. 아까부터 박사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몹시 괴로워하고 계세요.”
황박사는 잔디가 깔린 정원을 가로질러 가 현관문을 열었다. 리빙룸에는 저녁햇살이 가득히 비쳐들고 있었다.
대재벌 우일그룹의 주치의 황박사가 우일그룹의 방계회사인 우일산업 백사장댁에 왕진온 것이었다.
“사장님, 박사님께서 오셨습니다.”
가정부가 내실 도어를 노크하고 연통하자, 방 안에서 좀 지친 듯 한 쉰 목소리가 들려나왔다.
“어서오시오 황박사.”
황박사는 도어를 열고 커튼이 쳐진 백사장의 내실로 들어갔다. 침대위에 지친 듯한 백낙원 사장이 잠옷바람으로 누워있다가 상체를 일으켰다.
“좀 어떠십니까?”
“나가있어요.”
백사장의 말에 멍히 서 있던 가정부가 밖으로 사라졌다. 황박사는 진찰가방에서 청진기를 꺼내 그의 귀에 꽂으면서 백사장 쪽으로 한 발 다가섰다. (계 속)
“어디 진찰 한번 해 볼까요?”
“황박사, 난 병이 아니오. 저 문이 꼭 닫혔나 좀 살펴봐 주시오.”
백사장의 눈은 웬지 공포에 질려 있었다.
“아니 대관절 왜 그러십니까?”
“도어를 아주 잠가 주시오. 아주 긴한 얘기가 있소이다.”
“허어, 노이로제가 또 발작하신 게로군요.”
“노이로제가 아니라니까요. 내 얼굴 좀 보시오. 이게 사람의 얼굴이오? 난 협박을 받고 있단 말이외다.”
“협박?”
“놈은 날 죽일지도 모릅니다. 어서 도어를 잠가 주시오.”
“그러죠.”
황박사는 할 수 없이 도어로 가서 찰칵하고 도어놉을 눌렀다. 그만치 백낙원 사장은 겁에 질려있었고 그의 말은 심각했던 것이다.
“기왕 수고하신 김에 저 창문이 제대로 잠겨있나도 좀 봐 주시오.”
황박사는 창문도 가서 살펴봤다. 왜 백사장이 이렇게 겁에 질려있는지 황박사는 이해가 가지 않았으나, 본인이 하도 진지하게 간청하므로 그 청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
“창문은 다 잠겨 있는데요.”
“아니요. 커튼이 움직이는 걸 보면 분명히 누가 열어 놨습니다. 다시 한번 살펴보고 꽉 잠가 주시오.”
“그러죠.”
황박사는 다시 창문을 살펴봤으나 열어놓은 창문은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환자를 안심시키기 위해 황박사는 괜히 창문을 다시 열었다 소리나게 닫으며 문을 잠갔다.
“휴우, 이젠 안심입니다.”
백낙원 사장은 두 손으로 자기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누가 협박한단 말입니까?”
“내가 황박살 부른 건 병 때문이 아니라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기 때문이오. 놈은 틀림없이 날 죽이고 말 거요.”
백낙원 사장의 얼굴에는 체념의 빛마저 어려 있었다.
“백사장 답지 않게 왜 이러십니까? 경찰도 있고 한데 누가 백사장을 해친다는 게요?”
(계속)
우동석 dongs@sisa-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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