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인 살인사건 (제5회)

2007.02.16 11:02:02

“아저씨, 여기 이런 게 있어요.”
“뭔데?”
지욱은 유리 쪽을 바라보았다. 유리의 손에 한 뭉치의 편지다발이 들려져 있었다.
“이것 보세요. 무슨 편진가 봐요.”
유리가 갖다주는 편지다발을 풀던 지욱은 맥이 풀렸다. 그건 두 사람이 약혼시절에 주고받던 사랑에 넘친 사연들이었다. 그러니까 지욱이 경미에게 보낸 뜨거운 사연들이었다.
“아저씨, 무슨 편지예요?”
“아무것도 아니다.”
유리는 또 다른 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유리의 눈이 반짝 빛났다.
“어머, 내가 깜빡 잊고 있었네. 아저씨, 아줌마가 나갈 때 말예요, 병원에 들를 것처럼 말씀하셨어요.”
“병원에?”
“네, 이 약봉지를 보니까 생각나네요.”
유리의 손에 약봉지가 들려있었다. 그건 이 집의 오랜 주치의 황치성 박사가 경영하는 황내과의 약봉지였다.
“아니, 그걸 왜 인제 말해?”
“깜빡 잊고 있었어요.”
“알았다. 외출준비해 줘.”
지욱은 아내가 황내과에 들렀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으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때 거실의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지욱은 반가웠다. 전화벨 소리만 들어도 반가웠다.
“여보세요.
지욱의 음성이 떨려나왔다. 그러나 상대는 경미가 아니었다.
“나야, 우형빈이야.”
“아, 자네군. 웬일인가?”
“어제 꽤 마셨나보지. 내가 실수 안했는지 모르겠군.”
“실수는 무슨... 오랜만에 만났는데 제대로 대접도 못했어. 마누라가 없어서 말이야.”
“자네 부인 어제 늦게 들어왔나 보지?”
“응? 응.”
“왜 그렇게 힘이 없어?”
“여보게 형빈이, 실은 아내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네.”
한동안 저쪽에서 침묵이 흘렀다. 지욱의 말뜻을 잘못 알아들었던 모양이다.
“이곳저곳 연락해 봤지만 온데 간데가 없어. 그렇다고 동네방네 떠들며 찾아다니기도 뭣하고... 정말 미치겠어.”
지욱은 우형빈에게만은 사실을 털어놓고 도움을 청하고 싶었다.
“어떻게 돼서 그런지 짐작이 안 가나?”
“도무지 짐작이 안 가네.”
“이상한데? 그런데 왜 그러고 있나? 수색원을 내든지 해야지.”
“날 좀 도와줘야겠어. 이게 어디 소문내고 찾을 일인가? 아버지의 체면도 있고 해서 말이야.”
“내 그리 곧 가지.”
“아니야, 난 지금 황내과로 가야 해. 자네 교동 황내과 알지? 그리로 곧바로 오라구.”
“알았어.”
지욱은 전화를 끊었다. 시경 정보과 형사인 우형빈이라면 소문내지 않고 아내를 찾아줄 것 같았다. 지욱은 밖으로 나와 황내과가 있는 교동으로 차를 몰았다.
황내과는 붉은 벽돌로 지은 삼층건물이었다. 지욱이 현관문을 밀며 안으로 들어서자 낯익은 간호가가 반갑게 맞았다.
“황박사님 계시지요?”
“네, 계세요. 그런데 손님들이 와 계신데...”
간호사는 약간 난색을 띠었다.
“손님들이라니?”
“우이동 백낙원 사장님 살해사건 있잖아요? 형사들이 와서 참고로 몇가지 질문하고 있나 봐요.”
“아, 그렇군요.”
지욱은 한대 얻어맞은 듯 머리가 아찔했다. 그동안 방계회사 사장이 살해된 것을 잊고 있었다. 더구나 그 사람은 아내 경미를 중매한 장본인이 아닌가. 백낙원 사장 살해사건과 경미의 실종이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아버지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지욱은 지금까지 백사장 사건에 무관심했던 자신을 자책했다.
과연 아내의 실종이 백낙원 사장 사건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지욱은 비로소 백사장 사건이 실감돼 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백사장은 단순히 중매인에 불과했다. 그런 사람이 경미와 관계가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지욱이 밖에서 기다리는 동안 원장실에서는 시경 수사계 형사들이 질문의 화살을 황박사에게 던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전화를 받으신 건 병원으로 막 들어오시던 참이었군요?”
“그렇습니다.”
“백사장을 진찰할 때 백사장이 가정부를 쫓아내다시피 했다는데 왜 그랬을까요?”
다른 형사가 수첩에다 뭔가 기록하며 황박사에게 물었다. 황박사는 피곤한 듯이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누르며 형사를 쳐다봤다.
“백사장은 몸의 병보다 마음의 병이 더 컸습니다. 뭔가 몹시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누구에겐가 협박을 받고 있는 눈치였습니다.”
“구체적으로 그건 어떻게 느낄 수 있었습니까?”
먼저 질문했던 형사가 나섰다.
“내가 백사장 침실에 들어가자 백사장은 부들부들 떨면서 방문을 잠그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왜 그러느냐고 물었죠. 그러니까 백사장은 협박당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전에도 그런 증세가 있었나요?”
또다른 형사가 질문했다.
“가끔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나는 단순히 노이로제라고만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박사님께 백사장이 죽었다고 전화한 건 그 집 가정부라 이 말이죠?”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건 묘하거든요. 그 집 가정부 방은미는 그런 전화한 일이 없다는 겁니다.”
좀 날카롭게 생긴 수사계장 이근우가 말했다.
“뭐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황박사는 눈이 커지며 수사계장을 쳐다봤다.
“가정부는 백사장이 아무도 들여보내지 말라고 해서 그 방엔 접근하지도 않았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가정부는 백낙원씨가 살해된 사실도 몰랐던 거죠. 박사님께서 우이동으로 다시 뛰어오고, 그래서 방은미는 비로소 백낙원 사장이 살해된 걸 알았다는 겁니다.
순간 황박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럼 도대체 내게 전화한 여자는 누구였단 말입니까?”
황박사는 계산이 빗나간 건축설계사처럼 몹시 허둥대고 있었다.
(황박사님 큰일 났어요! 여기 백사장님 댁인데요. 방금 사장님이 누구에겐가 살해당하셨어요.)
이렇게 전화가 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전화를 한 장본인이 그 집 가정부 방은미가 아니라면 어떻게 된 노릇인가?
지욱이 원장실에 들어선 건 바로 이때였다. 황박사와 지욱이 시선이 잠시 마주쳤으나 황박사는 지욱에게 인사할 겨를도 없었다.
“난 분명히 가정부의 전화를 받고 우이동으로 뛰어갔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어떻게 백사장의 죽음을 알았겠습니까?”
“그 말씀은 옳습니다. 단 전화한 여자는 가정부가 아니고 다른 여자였다는 사실입니다.”
“그, 그래요?”
황박사는 좀 떨떠름한 얼굴이 됐다.
“박사님 기억으로는 분명히 가정부 목소리였습니까?”
이근우 수사계장이 다시 물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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