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안의 50년 人生 경영과 만남

2007.06.15 09:06:06

현대하면 이명박 전 서울시장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을 테지만 현대에는 1976년 현대중공업에 입사한 뒤 1998년 현대차 사장에 오르기까지 '셀러리맨의 우상'으로 불리며 이계안 민생정치모임 의원의 신화도 쌍벽을 이룬다.
평사원에서 대표 CEO가 되기까지 22년만에 거둔 그의 초고속 성공신화는 그 시절 셀러리맨들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고 생각만해도 흐뭇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계안 의원은 당시 평사원일 때와 임원이 되고 난 후에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일해왔고, 자신을 거울에 비춰 올바른 목표를 세우고 기본에 충실하는 것을 셀러리맨의 철칙으로 여겨왔다.
때문일까 국회에 입성 후 정치일선에서 보여지는 그의 철칙과 기본기, 굳은 의지 등은 현실정치에 식상해진 우리내 국민들에게 신선함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그는 지난해 5.31 지방선거에서 강금실 돌풍이 일었던 가운데 서울시민을 위해 한몸 바치겠다는 각오와 의지로 열린우리당 내 경선에 임했고, 강 후보에게 패해 고배를 마신 뒤에는 당당히 당을 위해 선거에서 밀알이 됐다.
17대 국회를 통해 입성한 초선이기는 하지만 현대차 사장과 현대캐피탈 회장 출신으로 30년 가까이 실물 경제현장에서 일한 그의 화려한 이력은 '경제를 살려야한다'는 정치권의 목소리에 부합했고, 열린당을 이끌면서 재야파의 수장이었던 김근태 전 의장을 통해 비서실장으로 전격 기용, 집권여당의 경제정책 기조변화를 꾀하는 키메이커로서의 역할도 했다.
지난 1월 몸담고 있던 열린우리당에 탈당 신고서를 제출한 그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 위해 불가피하게 기존 질서를 무너뜨릴 수밖에 없다"며 탈당의 변을 밝혔다.
이 의원은 영등포 당사를 찾아 "일본의 도요타 자동차가 렉서스라는 브랜드로 세계 자동차 시장을 어떻게 석권했는가 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정치의 렉서스를 만들겠다는 말을 드리면서 열린우리당을 떠난다"고 밝혔다.
탈당의 변을 마치고 당사를 떠나면서 그는 기자실과 당 사무실에 들러 착찹한 표정으로 미안함을 전했고,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당직자들은 "탈당하면서 직접 탈당 신고서를 제출하고 마지막 인사까지 한 사람은 그동안 없었다"며 그를 '쿨한 사람'으로 평가했다. 마지막 떠나면서까지 몸담았던 곳을 향한 최소한의 배려를 아끼지 않는 모습에서 그의 성품은 드러난 것.
이제 새로운 정치활동을 모색하며 민생정치모임에 뛰어든 그는 함께 하는 이들과 함께 연말 대선정국을 앞두고 "모든 정당과 정파는 기득권을 버리고 개인자격으로 대통합의 한 길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범여권내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배고파 본 사람은 남을 위할줄 안다. 정치인 이계안이 그렇다. 어린시절 그의 부친은 정치활동으로 오랜 옥고를 치렀고, 응당 집안 형평은 말이 아니었다. 그는 부친의 빈자리를 조부가 사랑으로 채워주었음을 자신이 걸어온 길에서 밝히면서 그에게 있어 조부는 "빛과도 같은 존재였다"고 표현했다.
지금의 평택항 근처인 평택의 시골마을 내기리에서 태어난 이 의원은 비록 시골소년이었지만 일찍이 천자문을 떼고 초등학교 전에 한글을 깨치는 등 제법 조숙했었다고 알려졌다.
서울경복고등학교에 진학한 이 의원은 당시 공군사관학교 후문에서 자취를 하면서 수돗물로 허기를 채우며 고학했고, 서울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 재학시절에 당시 이화여대 국문과에 다녔던 부인과 만나 연애 7년만에 결혼, 단칸방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대학졸업 1년만인 1976년 현대중공업에 입사한 그는 93년 현대석유화학 이사, 96년 현대차 사장, 2001년 현대캐피탈/현대카드(주)대표이사 회장을 역임했다.
수돗물을 끼니 삼아 배를 채우던 어려운 시절이 없었다면 그의 성공신화는 찾아 볼 수 없었을지 모른다.
이 의원은 지금도 새벽 4시가 넘으면 저절로 눈이 떠진다고 한다. 현대에 입사한 이래로 30여년간 줄곧 아침 6시쯤 회사에 도착했고, 어릴 적 별명도 '교문 여는 학생'이었을 만큼 항상 1등으로 학교에 도착하곤 했다.
그의 아내는 이 의원이 월요일 아침에 미소지으면서 출근할 때가 가장 생기 있어 보인다고 했고, 그 역시 신선한 아침공기를 마시며 일터로 나갈 때만큼 행복한 순간이 없다고 털어놓는다.
이 의원은 현대의 기아차 인수를 직접 진두지휘하기도 했다. 당시 부실기업 기아에 대한 수많은 부정적 견해에도 불구하고 소신있게 밀고 나가 결국은 전자산업과의 시너지효과를 끌어내 세계속에 현대자동차로 입지를 굳힐 수 있었다.
국제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생산능력의 획기적인 확대가 필수라는 그의 확신 때문. 그 후 크라이슬러와의 합작 등을 통해 재무위기를 돌파하고 그는 노조와의 대화와 타협으로 노사위기를 해결했다.
그 후 현대캐피탈과 현대카드 회장직을 맡아 카드사의 위기 가운데 내실과 수익경영 위주로 사업을 재편해 현대카드를 업계 최초의 월별 흑자 달성회사로 만들었다. 주변에서는 이런 그를 두고 본능적으로 위기에 강한 승부사적 기질이 있다고들 평한다.
그는 지금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밤 10시면 자서 새벽 3~4시에 일어난다고 한다. 일찍자고 일찍 일어나서는 신문을 보고, 자기 공부를 한다. 오랜 임원 생활동안 굳어져온 자세.
때문에 밤 10시가 지나면 어지간히 급하지 않는 이상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어렵다. 한때 신학을 공부하고 싶어했던 그는 지금도 목회자의 길을 걸을까 말까 고민중이다.
주일날은 세상없어도 교회에 간다. 안식일에 일하는 것은 하나님 말씀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물경제에 밝은 그는 대한민국이 '잘사는 나라'가 되는데 합리적 시장주의자이자 경제전문가인 자신과 같은 사람이 꼭 필요하다는 말에 공감했고 한국경제를 살리는데 밀알이 되기 위해 정계에 입문했다. 30여년에 걸쳐 이룩해놓은 그의 성공신화가 대한민국 업그레이드의 계기가 될지 정치권과 그를 바라봤던 경제계는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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