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어머니 ‘손봉숙 의 힘!’

2007.07.12 17:07:07

여성의 사회적 권리 향상, 정치학자이자 여성지도자인 민주당 손봉숙 의원과 같은 인물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해방 후 반세기 동안 여성의 사회적 지위는 한층 높아졌고, 심지어 ‘여성상위시대’라는 말도 생겨났지만 한국여성정치연구소 설립 등을 통해 차세대 여성지도자를 육성하는 등 실질적 활동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모두가 힘들었던 시기, 부모와 가족들의 적극적인 교육철학으로 소귀의 교육을 받았고, 이를 바탕으로 여성권리 향상을 위한 열정을 손 의원과 같은 인물들이 바쳤기에 이만큼 오지 않았을까.
손봉숙 의원은 해방전인 1944년 경북 영주에서 태어났다. 부친인 손병오씨는 ‘사람은 아는 것이 가장 위대하다’는 명심보감을 좌우명으로 8남매를 모두 공부시켰고, 그의 모친인 황봉한씨도 “여자일수록 배워야 대접을 받는다”는 믿음으로 딸들을 가르쳤다.
‘여자가 공부해서 어디쓰느냐’며 초등교육의 기회조차 박탈했던 그 시대 대부분 가정의 교육관과는 분명 다른 것이다. 때문에 손 의원은 6.25전쟁이 터진 1950년 영주국민학교를 입학했고, 이어 영주여중·고를 졸업, 이화여대에 진학했다.
이화여대 정외과에서 정치학을 공부한 그는 동 대학원 정외과를 진학, 석사과정을 밟았고, 이후 남편을 따라 미국유학길을 택해 하와이대학교 대학원 정외과에서 정치학 석사를 땄다.
그는 또 미국프린스턴대학교 우드로윌슨스쿨에서 수학했고, 한국에 돌아와 이대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손쉽게 공부한 것만은 아니다. 그는 지금 서울대 교수로 있는 남편(안청시씨)을 따라 미국에 가면서 그의 공부 뒷바라지와 가족생계를 책임졌고, 자신도 공부를 했기에 1인 4,5역을 해내야만 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손 의원은 자신의 교육혜택을 스스로에게만 돌리지 않았다. 국토통일원 시절, 자료관리국 자료조사담당관으로 일하면서 첫 여성담당관이라는 책무를 지게된 그는 북한 및 통일관련 국내외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일을 보게됐다.
이때 손 의원은 북한의 로동신문과 소련의 이스베스챠 등 그동안 불온서적으로 분류되어 온 모든 자료에 접할 수 있게 됐고, 특히 북한에서 발간되는 일간지와 주간지 및 월간지, 연감, 소설류도 읽게됐다.
당시 북한관련자료를 수집하고자 일본 및 미국 등지로 출장을 다녔던 그는 불온서적을 읽던 것에서 자신이 직접 자료를 체계화하기로 결심, 일본에 나우카 서점과 학우서방 등을 누비고 다녔고, 나우카 서점과의 직거래를 터서 그때까지 발간한달 후에나 들어오던 로동신문을 일주일 후에 받아볼 수 있도록 체제를 개편했다. 또한 전 세계 300여개의 출판사 목록을 작성, 사회과학 전반에 걸친 최신자료를 직수입해 왔고, 누락된 정기간행물까지 완비해 놓았다.
특히 북한자료를 만지면서 북한여성에 대한 자료에 주목을 하기 시작한 손 의원은 이때부터 북한 여성에 대한 자료를 하나둘씩 모았고 그 결과 <북한의 여성생활>(손봉숙 외, 나남출판사, 1991) 및 <북한의 여성 : 그 삶의 현장> (손봉숙저, 공보처 1994)등 두 권의 북한여성관련 저서를 펴내게 됐다. 또 <북한여성연구회>를 구성, 북한여성연구에 대한 여성계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통일운동에도 앞장서게 됐고, 남북통일의 과업중 사회통합의 과제는 남북의 여성들이 주춧돌을 놓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이어 1980년 8월 프린스턴대학교로 유학을 가게되면서 만 3년간의 공무원 생활을 청산하게 되었지만 공무원은 여성들이 담당하기에 매우 적합한 직업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프린스턴대에서 공부를 마치고 귀국, 이대 대학원 박사과정을 밟을 때 그는 총무처 중앙공무원교육원 조교수로 공채돼 공부를 하면서 후학양성에도 힘썼고, 통일원시절과 중앙공무원교육원 시절을 통해 대한민국 공무원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됐다.
소신보다는 무사안일을 택하는 시간때우기 공무원이 너무 많다는 것도 깨달았고, 공무원사회가 거듭나지 않고는 우리나라 전체가 국제경쟁력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때문에 손 의원은 싱가포르와 같이 가장 우수한 인재가 공무원이 되고 일단 공무원이 되면 최고의 보수가 보장되는 일하는 공무원, 깨끗한 공무원상을 정립하기 위한 노력을 해나갔다.
그가 싱가폴에서 동남아연구소 객원연구원으로 지낸 기간 (1996.9-1997.1) 남편은 싱가폴대학의 정치학과에서 한국정치를 한 학기 가르쳤고, 그는 동남아 및 태평양지역의 여성운동에 대해 공부했다.
깨끗한 공무원으로 이름 날리는 싱가폴정부, 사실상은 독재정부에 가까우면서도 민주정부로 보이는 싱가폴의 정치, 당시 동남아에서 가장 잘 사는 도시국가, 나라 전체가 마치 공원같이 아름답게 잘 꾸며진 나라 등등 싱가폴에 대한 선망의 눈길도 만만치 않았다.
이때 손 의원은 장차 우리나라가 나아갈 길도 바로 ‘큰 싱가폴’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
특별법 옥외광고사업 20년의 순기능은 있었나?
국회에 진출한 뒤 문화광광위 소속으로 의정활동에 충실하고 있는 손 의원은 28일 기금조성 옥외광고 정책의 새로운 패러다임 정립을 위한 토론회를 열고, 현실속 옥외광고정책의 대안적 패러다임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했다.
손 의원은 지난해 9월 특례 옥외광고사업을 더이상 허용해서는 안된다는 취지의 ‘옥외광고물등관리법’ 개정안을 제출한 바 있고 이 법안은 이달 행자위를 통과해 법사위심의를 남기고 있다.
그간 우리 정부는 취약한 재정상황을 핑계로 각종 국제경기대회를 치르는 편리한 재원으로 특례 옥외광고사업을 활용해 왔고 그때그때 졸속의 특별법제정을 통해서 옥외광고사업을 연명해 왔던 문화관광부는 각종 국제대회조직위가 지난 20년간 그야말로 독과점과 편법으로 이 사업을 파행운영해 왔던 관행을 수수방관해 왔다.
때문에 손 의원은 옥외광고사업은 옥외광고정책의 주무부서인 행정자치부의 소관으로 일원적으로 운영되어야 하며, 투명하고 공정한 사업운영시스템을 통해 정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입법 발의한 것. 토론회를 통해 손 의원은 더 이상 기금조성 옥외광고정책이 특정 광고사업자를 배불리고, 정부가 손쉬운 재원을 마련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되어서는 안되며 국가 옥외광고정책의 중장기적 계획 하에서 합리적으로 운영되어야 함을 지적했다.
국회헌정기념관 대강당에서 열린 토론회에는 손 의원의 ‘기금조성 옥외광고 정책이 달라진다’라는 발제 아래 한나라당 이상배(경북상주) 의원이 축사하고, 행자부 박성호 생활여건개선 팀장과 국민대 이종민 교수가 ‘사업운영시스템 혁신방향 및 과제’, ‘대안패러다임 모색을 위한 유형별 사업고찰’을 주제로 발제했다. 또한 심성욱 한양대 광고홍보학과 교수, 정광호 한국옥외광고대행사업협회 부회장, 김기원 한국광고주협회 상무, 박현 엘지애드 부장, 최범 희망제작소 간판연구소 소장, 임병욱 한국전광방송광고협회 회장 등이 토론자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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