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인 살인사건 (제16회)

2007.08.31 16:08:08

“그건 황박사도 그렇게 증언했어요. 그런데 백사장은 가운을 벗고 양복을 갈아 입었거든요. 더구나 살해당하기 직전에 말입니다. 그래서 목이 와이셔츠에 졸릴 정도 였거든요.”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어떻게 해서 사장님이 옷을 갈아입는지.”
“그럼 누가 찾아오기로 돼 있지 않았습니까? 예를 들면 백사장이 옷을 갈아입어야 하리만치 예의를 갖추어야 할 인물이 말입니다.
“그런 일은 없었어요. 전화도 전부 제가 받고 있었으니까요.”
“황박사가 돌아가고 사장님이 마실 걸 찾았다는데, 쥬스를 갖다 드렸습니까?”
“네.”
“그때 방에 아무도 없었나요?”
“사장님 혼자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주스잔이 어디로 갔습니까?”
“아무리 찾아봐도 없습니다.”
“좋습니다. 돌아가십시오.”
마형사는 방은미를 돌려보냈다. 백사장은 부검결과 필로카르핀이라는 독극물에 의해서 살해됐다. 그런데 문제는 주스잔이 감쪽같이 현장에서 사라진 것이다. 물론 범인이 가지고 갔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범인은 어디로 들어와서 어디로 사라졌을까? 범인은 적어도 백낙원과 잘아는 자라야 한다. 그래서 백낙원은 몸이 불편한 데도 옷을 갈아입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좀처럼 그 인물은 떠오르지 않았다. 방은미의 증언을 크라운제과에 확인해 본 결과 오누이가 만났다는 걸 증명해 줬다.
그러니까 방용철은 백사장이 살해되기 훨씬 전에 우이동에 다녀갔으며, 그가 백사장을 살해하리만큼 강력한 동기가 없다는 것이 판명됐다.
그래서 방용철은 석방됐다. 그가 시경을 걸어나가는 걸 보면서 우형빈은 착잡한 심정을 누릴 길이 없었다.
아직 나경미의 실종은 정식으로 경찰에 신고된 게 아니었다. 친구의 부탁으로, 순전히 우정으로 김지욱을 도와주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래서 수사과 형사들에게 그 사건을 말할 수 없는 게 우형빈으로써는 안타까웠다.
우형빈의 생각으로는 방용철이 동기가 없는 게 아니었다. 수사과 형사들은 모르지만, 방용철이 죽자사자 따라다니던 나경미를 다른 사람 아닌 백낙원 사장이 김회장의 아들 김지욱에게 중매를 해줬으니, 방용철은 백낙원 사장이 죽도록 미웠을 것이다. 그가 백사장을 협박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다.
그래서 우형빈은 마형사한테 문제의 협박장을 보여달라고 했다.
“유감스럽게도 협박장은 태워 없어졌습니다.”
“그럼 협박을 받았다는 정확한 증거는 없는 게 아닌가?”
“그렇습니다. 황박사의 증언에 의하면 백낙원 사장이 몹시 겁을 내고 있었고 누구에겐가 협박을 받고 있다고 하더랍니다. 그런데도 협박장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사건 직전에 현장에 감색 투피스를 입은 여자가 서성거렸다는데 그건 누구라고 생각하나?”
“아직 알수가 없습니다.”
“그럼 이 사건은 시간을 끌겠군.”
“그럴 공산이 큽니다.”
마형사는 골치가 아프다는 듯이 한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우형빈은 정보과로 돌아와서 지욱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시간에 지욱의 집에는 누군가가 찾아와서 버저를 누르고 있었다.
“누구시오?”
정원사 박서장이 대문에 나가자 험상궂게 생긴 청년이 문 밖에 서 있었다.
“김지욱씨 계십니까? 김실장 말입니다.”
“어디서 오셨소?”
“방용철이라고 하면 알 겁니다.”
“지금 안 계시니 돌아가 주시구려.”
박서방은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방용철은 시경을 나오자 바로 삼청동 김회장댁을 찾아온 것이다. 그는 거대한 대문의 층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지욱을 기다리려는 것이었다.
박서방은 현관문을 열고 지욱의 서재로 다가갔다. 사실은 집에 지욱이 있었던 것이다. 경미의 실종 이후 지욱은 회사에 출근하지 않고 웬만한 일은 전화로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실장님.”
“왜 그래요?”
지욱은 침대에 누워 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손님이 찾아왔는데 어찌나 생김생김이 우락부락하게 생겼는지 안 계신다고 그랬습니다.”
“방용철이랍디까?”
“아니, 그걸 어떻게?”
지욱은 우형빈에게 온 전화를 방금 끊었다. 어쩌면 방용철이 찾아갈지도 모른다고 우형빈은 말했다. 그 예감이 들어맞은 것이다.
지욱은 밖으로 나갔다. 대문을 여니 방용철이 층계에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아이구, 안 계시는 줄 알았더니 계시누만요?”
“웬일이오.”
“어쩌면 명동에선 그렇게 시치밀 딱 떼셨습니까? 경미씨 숭배자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방용철은 히죽거리며 웃었다.
“나한테 무슨 용건이오?”
“사모님이 행방불명이라구요?”
“그래서요?”
“아, 물론 압니다. 이런 큰 댁에서 며느님이 실종됐다는 건 큰일이죠. 그리고 아직 발표할 단계가 아니란 것도 알고 있습니다. 물론 나도 비밀은 지키겠습니다. 사실 난 경미씨가 내 하숙집에서 도망친 이후는 전혀 모릅니다. 이건 맹세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걸 얘기하러 온 거요?”
“아닙니다. 나도 우일산업의 녹을 먹고 있는 만치...”
“그 얘긴 빼요.”
“좌우지간 이렇게 만난 것도 우연은 아닙니다. 그래서 경미씰 납치해간 놈을 내 손으로 잡아오겠다 이겁니다.”
“어떻게 납치라고 단정하시오.”
“이건 납칩니다. 분명히 그 놈들일 거예요.”
“그놈들?”
“아, 아직 밝힐 단계는 아닙니다. 모든 건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되니까요. 아무튼 난 뭔가 짚이는 게 있습니다. 나는 놈들의 마수가 뻗칠 줄 알고 있었습니다.”
“무슨 뜻이오? 좀 더 자세히 말해 보시오.”
“시간이 없습니다. 하루만 여유를 주십시오. 꼭 놈을 붙잡이 오겠습니다.”
방용철은 이렇게 내뱉고 돌층계를 뛰어내려가고 있었다. 그는 골목길을 뛰어가다 지욱을 돌아보고 소리쳤다.
“틀림없이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오겠습니다.”
방용철이 무엇을 안단 말인가? 무엇을 알기에 저렇게 자신하면서 뛰어갈까?
잠시 후 우형빈이 왔다. 지금의 지욱으로써는 우형빈만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두 친구는 양주잔을 기울이면서 방용철에 관한 얘기를 주고받았다.
“방용철은 뭔가 알고 있는 게 아닐까?”
“글세…”
“방용철이 우일산업에 취직한 경위는 밝혀졌지만, 어딘가 석연치 않은 점이 있어.”
“백사장이 가정부의 부탁으로 중요한 인사권을 행사했다고는 믿어지지 않아.”
“무슨 뜻이지?”
지욱은 잔을 흔들면서 우형빈을 바라봤다.
“어쩐지 백사장이 방용철에게 약점을 잡혔던 것 같단 말이야.”
“그게 어떤 약점일까?”
“글세, 그걸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단 말이야. 어쩌면 자네 부인으로 인한 사건이 아니었을까?”
“난 그런 건 생각하고 싶지 않아.”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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