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인 살인사건 (제22회)

2007.11.30 11:11:11

“압니다. 그 여자가 어떻다는 겁니까?”
“그 여자의 매력 때문이었죠.”
영숙은 다시 잔에 막걸리를 따라 지욱에게 내밀었다. 지욱은 목이 탔다. 그걸 단숨에 비우고 다시 영숙을 쏘아봤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여자가 여자의 매력에 끌린다는 얘깁니까?"
“서정숙 여사는 한일여대 우리 대선배였어요. 학교에서 인기가 대단한 미인이었어요.”
“그래서요?”
“경미하곤 에스 언니, 에스 동생 사이였죠. 웬일인지 경미는 정숙 언니한텐 꼼짝도 못했어요.”
지욱은 묘한 감정에 휩싸여 있었다. 또 서정숙이란 여자가 떠오른 것이다. 그렇다면 경미는 서정숙이 김회장과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 여자가 경미를 비밀요정으로 유혹했군요.”
“비밀요정은 서정숙 여사가 경영하던 거였어요.”
“뭐요?”
젊어서부터 비밀요정을 경영할 만한 여자는 그리 흔하지 않다. 아무튼 서정숙은 활약이 대단했다.
“거기가 어딥니까? 설마 묵정동에 있는 요정 한정원은 아닐테죠?”
“바로 거기예요. 지금은 어엿이 간판을 내걸었지만, 옛날엔 비밀요정이었어요.”
지욱은 눈을 감아버렸다. 정신이 어질어질해 왔다. 그것은 막걸리 서너사발을 마셨기 때문이 아니었다. 아내의 새로운 일면을 발견하고 그는 정신이 아찔했던 것이다.
그날 저녁, 지욱은 자꾸만 싫다고 하는 오영숙을 데리고 요정 ‘한정원’으로 향했다. 안에서는 밴드의 연주가 흘러 나오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전번의 그 보이가 두 사람을 맞았다.
“이봐, 방 난 거 있나?”
“아이구, 이게 누구십니까? 오늘은 여자분하고 오셨군요. 이리 오십시오.”
두 사람은 보이의 안내로 요정안으로 들어섰다. 막 복도를 거쳐 오른쪽으로 꺾어돌다가 지욱은 하마터면 누구와 부딪힐 뻔했다.
“아, 미안합니다.”
“아니 괜찮소.”
하다가 두 사람은 동시에 굳어졌다. 상대는 비서실장 주강호였던 것이다.
“주실장이 웬일이오.”
“아, 네. 회장님의 심부름으로... 실례하겠습니다.”
주강호는 황망히 사라졌다. 그 등을 바라보면서 지욱은 강한 의혹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주강호가 이 요정에 나타난 게 이상한 것이 아니라, 주강호의 그 수상한 뒷모습이 지욱에게 왠지 혐오감을 줬던 것이다. 지금으로선 주강호 그가 이 사건에 하등 관계가 없는 데도 말이다.
지욱은 요리상이 들어오자 보이를 불렀다.
“이봐, 서마담 있지?”
“지금 안 계신데요.”
“안 계셔? 영업시간인데 마담이 없다니 말이 되나?”
“급한 용무가 있어서 잠깐 나가셨습니다.”
“어디?” “의상관계로 나가신 모양입니다. 헤헤 손님. 미인하고 오셨으면서 마담은 왜 찾으십니까? 그럼 많이 드십시오.”
보이는 장짓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오영숙은 차려진 요리상을 보고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왜 그러고 있습니까?”
“그 이상은 저도 잘 몰라요. 서정숙 선배가 비밀요정을 했다는 것, 그리고 경미가 한동안 거길 나갔다는 것. 그것 밖엔 몰라요. 그 이상은 물으셔도 대답할 게 없어요.”
“그럴 테죠.”
지욱은 자작해서 술을 따라 마셨다. 그는 밴드를 불렀다. 또 호스티스 두 명도 불렀다. 영숙이 말려도 막무가내였다. 그는 노래도 불렀고 나중에는 만취돼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주정을 하기도 했다.
영숙은 지욱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여자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그 주정을 다 받아내고 엉망으로 취해 늘어진 지욱을 택시에 태워 삼청동 그의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지욱은 아무것도 몰랐다. 언제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아침에 지욱은 심한 두통으로 일어났다. 며칠동안 몹시 앓고 난 사람처럼 지욱은 퀭한 자기 눈을 들여다 봤다. 악몽을 꾸고 난 기분이었다. 아내가 죽었다는 것도, 어젯밤 만취하도록 술을 마셨다는 것도 하룻밤의 악몽처럼 살아났다.
우형빈이 찾아온 것은 지욱이 아침 대신 밀크를 한 잔 마시고 난 후였다. 그는 들어서자 마자 녹음기에 테이프를 끼우고 스위치를 눌렀다. 지욱이 경미의 전화를 받는 그 음성이 녹음기를 통해 흘러나왔다.
“여보, 나예요.”
“아, 아니 당신, 경미 아니야?”
“여보 미안해요. 난 당신을 사랑해요. 사랑하기 때문에 집을 나온 거예요.”
“아니, 그게 무슨 말이야? 당신이 집을 나갈 이유가 없잖아? 당신 어디 있는지 얘기만 해. 당장 뛰어갈 테니까.”
“오지 마세요. 난 아주 멀리 있어요. 미안해요.”
그리고 전화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우형빈은 녹음기를 껐다. 지욱은 두 손으로 얼굴을 싸안고 괴롭게 녹음소리를 듣고 있었다.
“미안하네. 이런 걸 들려줘서 말이야.”
“왜 들려주지?”
지욱은 고개를 들었다.
“자네. 못 들었나?”
“저 목소리를 어떻게 나한테 들려줄 수 있지? 아내는 집을 나간 후 그 이튿날 살해당했어. 그런데도 나한테 저렇게 전화를 하고 있단 말이야. 지독한 놈이야...”
지욱은 어금니를 씹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내가 말하는 것은 그게 아니야. 자네와 부인의 대화 속에 가늘게 들리는 무슨 소리가 들리지 않았나?”
“가늘게 들리는 소리? 그건 잡음이 아닌가?”
지욱은 비로소 사태의 중요성을 깨닫고 형빈을 응시했다.
“잡음이 아니야. 다시 한번 들어보겠어?”
“아니, 켜지 말게. 그 소리만 들으면 미칠 것 같아.”
“들어야 해. 범인을 잡는 건 감정이 아니야. 괴롭더라도 범인이 쳐놓은 그물을 거두어야 하네. 자넨 강해져야 돼. 그게 범인을 이길 수 있는 길이야.”
우형빈은 다시 녹음기를 틀었다. 다시 아내와 지욱의 통화 소리가 들려왔다.
“저 소리, 저 소리 말이야. 들리지 않나?”
“저게 무슨 소리지?”
과연 아내의 음성 중간중간에 뭔가 낮지만 날카로운 금속성이 들리고 있었다.
“저게 무슨 소리야?”
우형빈은 녹음기를 껐다.
“나도 그 소리를 처음에는 발견 못했어. 시경에 성문감식반에서 찾아낸 소리야. 미국에서 사운드 스코프라는 기계를 들여왔는데 그 기계에 녹음테이프를 끼우면 무슨 소리든지 잡아낼 수 있지 자네도 알다시피 사람마다 지문이 다른 것처럼 음성도 다르게 마련이야. 이것을 성문이라고 하네. 사람마다 목소리의 파장이 다르거든.”
“그래서, 저건 아내의 음성이 아니란 말인가?”
“그건 아직 모르지. 자네 부인의 음성을 녹음하지 않았으니까. 우리가 주목한 것은 부인의 음성이 아니라, 자네도 들었다시피 저 낮으면서 뭔가 날카로운 그 소리였네.”
“그게 무슨 소린가?”
“사운드 스코프로 저 소리를 증폭해서 분석해 봤더니, 저 소리는 목재소에서 나무 켜는 톱소리였어.”
“톱소리.”
“전기톱 소리야. 자네도 목재소에 가본 일이 있겠지? 거대한 통나무가 돌아가는 전기톱에 어이없이 잘려나가는 광경을 보지 못했나? 부인은 목재소 근처에서 전 전화내용을 녹음했거나, 최소한 전기톱이 있는 목재소 근처의 어느 방에서 녹음을 했는지 모르지. 그리고 무주 구천동에 끌려가 살해된 거지.”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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