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도퍼도 끝없는 상상력의 원천
동서양 초월하는 고전적 장치
갈등과 긴장 빚어내기 유용
아내와
딸을 둔 한 남자가 교통사고로 기억을 상실하고 죽음의 문턱에서 자신을 구한 여자와 결혼해 아들을 낳는다. 정체성을 고민하던 남자는 기억을
되찾고 현재의 아내와 과거의 아내 사이에서 갈등한다.
KBS 2TV에 방영 중인 멜로드라마 ‘아내’의 대략적 스토리다. 이 전형적인 이야기 구성은 낯익다 못해 진부하기까지 하다. 드라마 ‘아내’는
1982년 MBC 동명 멜로물을 리메이크 한 것이지만, 기억상실증이라는 소재는 80년대 이전부터 이미 ‘고전’이 된 지 오래다.
1942년의 흑백영화 ‘마음의 행로’부터, ‘환생’ ‘돌로레스 클레이븐’ ‘롱키스 굿나잇’ ‘메멘토’ ‘나비’ ‘오버 더 레인보우’ ‘유리구두’
‘겨울연가’ 등 영화와 드라마는 물론, 고행석의 만화 ‘낮달’, 윤대녕의 소설 ‘사슴벌레 여자’ 등 장르와 시대를 막론하고 기억상실증은
널리 사용된 소재다.
리메이크를 반복한 고전은 진부하지만 그만큼의 매력 또한 크다. 상투성을 감안하면서까지 계속적으로 만들어지고, 아무리 되풀이해도 재미있으며,
무궁무진한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것은 소재가 지닌 파워가 상당하다는 증거다.
독특하고 낭만적인 기억상실증이라는 병은 어떤 이유로 이처럼 동서양과 시대를 초월해 대중문화의 사랑 받는 단골소재가 됐을까?
멜로물 안타까운 갈등구조, 추리물 긴장감 증폭
기억상실증의 원조는 제임스 힐튼이다. ‘잃어버린 지평선’에서 기억상실증이라는
장치를 본격적으로 도입한 그는 ‘마음의 행로’(원제:랜덤 하베스트)로 기억상실증 드라마를 장르화 했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한 인간이 자신을
도운 이성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기억을 회복한 후 그 이성과의 추억을 잃어버린다는 기억상실증의 표본이 된 줄거리는 이 영화에서 출발한
것이다. 아무리 상투적 소재라도 원조는 역시 다르다. 제임스 힐튼은 멜로물의 거장답게 탄탄한 구성과 주옥같은 대사로 소재의 매력을 충분히
활용한다.
인물의 정체성 찾기, 극적 반전의 묘미, 안타까움과 애절함, 사랑에 대한 통찰까지 ‘마음의 행로’는 기억상실증 멜로물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문화평론가 이용포 씨는 “기억상실증은 안타까움과 로맨틱함을 자아내기 쉬운 장치다. 기억상실 전후로 갈등 구조가 형성되며, 극적 요소가 많아
상당한 흡인력을 발휘할 수 있다”며, “기억상실증을 전후로 신분이 크게 바뀌거나 상대 이성의 신분도 대비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모두
갈등구조와 드라마틱한 반전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다”고 설명했다.
추리물에도 기억상실증은 단골소재다. 기억상실증은 한 부분의 사건이 미궁에 빠지고, 기억들을 하나하나 짜맞춰 가며 회복한다는 면에서 그 자체가
추리적 성격을 지닌다. 때문에 멜로물에 사용될 때도 미스터리적 요소를 갖는다.
추리물에서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인물이 사건의 열쇠를 잃어버린 기억 속에 안고 있는 경우가 많다. 흩어진 기억 조각들은 무엇을 먼저 보여주느냐에
따라 오해를 만들고 강렬한 반전을 유도할 수 있다. ‘돌로레스 클레이븐’에서 아버지를 살해한 어머니를 증오하던 주인공은 잃어버린 기억 속에서
어머니가 자신에 대한 보호본능으로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버지를 살해한 이유와 살해방법을 조금씩 찾아나가는 과정의 긴박감은
기억상실증이라는 장치 없이 만들어내기 어렵다.
이씨는 “추리물에서 기억상실증은 여러 단계의 반전 설정이 가능하고, 긴장감과 흥미를 얼마든지 증폭시킬 수 있는 소재다. 작가라면 한번쯤
활용하고 싶을 만큼 매력적인 기법이다”고 말했다.
‘나는
누구인가?’ 철학적 고민 내포
기억상실증은 또한, 심리적 철학적인 문제를 안고 있는 소재라는 점에서 호소력이
크다. 문화평론가 박인영 씨는 “인간에게는 기본적으로 지난날의 잘못과 한, 미련, 아쉬움을 떨쳐버리고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거나, 전혀
새로운 삶의 기회를 가져 보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며, “영화나 드라마 속의 기억상실은 이미 다 자란 성인 인물에게도 새로운 자기정체성을
구현케 하거나 그 기회를 부여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 소재다”고 지적했다.
‘나는 누구인가?’ ‘추억은 무엇인가?’ 등 철학적 질문을 내포하고 있는 점도 기억상실증이 단골소재가 된 이유다. ‘지킬박사와 하이드’는
지킬박사가 한 일을 하이드가 기억하지 못하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다중적 인간의 면모를 기억상실증이라는 소재를 통해 드러낸 대표적 작품이다.
기억상실 전후로 선과 악의 극단을 오가는 경우가 많은데, 정체성의 혼란을 보다 선명하게 부각시키려는 의도다. 영화 ‘토탈리콜’의 원작인
필립 K딕의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는 기억이식이라는 기억상실의 SF적 버전으로, 현실과 가상의 경계와 존재의 실체에 대한 고민을 심각하게
다룬다.
기억상실증은 현대사회를 비판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문승욱의 디지털 영화 ‘나비’는 새로운 것을 감각적으로 좇아가는 현대인을 모두 ‘기억상실의
바이러스’에 걸린 존재로 표현했다. 윤대녕의 ‘사슴벌레여자’는 기억을 잃고 사이보그처럼 살아가는 인물을 통해 감정이 메마른 현대인들의 외로운
삶을 형상화했다.
이처럼 기억상실증은 로맨틱하고 드라마틱하면서도 고차원적 문제를 안고 있는 흥미로운 소재다. 때문에 동서고금 할 것 없이 애용된 것이다.
진부함은
소재 아닌 창조력 한계에서 비롯
무엇이든 전형화 된 것은 훌륭한 원조가 존재하며, 상상력을 자극하는 요소가 퍼도퍼도
바닥나지 않는 우물처럼 깊고 많기 마련이다. 하지만, 정해진 이야기 코스가 반복되다보면 진부함은 꼬리표처럼 따라붙게 되고, 상투적 소재는
매력적인 만큼 식상함의 함정을 안게 된다.
과거와 현재의 연인이 등장하고, 기억상실에 빠지거나 기억을 되찾는 매체는 대부분 교통사고 등 우연적 설정이며, 충격으로 중요한 기억을 잃은
자는 정체불명의 악당에게 쫓기는 등 뻔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기억상실증이라는 소재의 한계다.
하지만, 평론가 박씨는 “소재 자체보다는 어떤 소재를 다루든 관계없이 상투적인 안방드라마나 멜로 영화의 나태함이 문제다”며, “선정적 소재도
얼마든지 신선하게 그릴 수 있다”고 지적했다. 작품성은 소재로 판가름나는 것이 아니라, 작가정신이 얼마나 치열한가에 달려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기억상실증을 사용하면서도 소재의 한계를 극복한 우수작들은 계속 나오고 있다. 필립 K딕은 60년대부터 끊임없이 기억상실을 사용한
소설을 발표했지만, 소재의 접근 방식과 주제는 현대적 시각에서도 여전히 새롭고 충격적이다. 때로는 스토리의 법칙까지 고스란히 유지하면서도
감동을 주는 작품도 있다. 문제는 무엇을 이야기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이야기하는가, 라는 교과서적 진실에 달려있다.
정춘옥 기자 ok337@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