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을 찾아서(15)
한겹한겹 배어나는 전통의 미
오색전지공예 맥 잇는 김인숙 씨
우리에게
익숙한 전통 공예지만 아직 그 분야에 지정된 인간문화재가 없는 것은? 정답은 한지공예다. 한지공예는 제작방법에 따라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종이를 여러 겹 덧발라 살을 두텁게 하여 골격을 만들고 그 위에 색지와 문양을 붙여 완성하는 전지공예와 종이를
일정한 크기로 재단하고 그것을 이어가면서 꼰 종이끈으로 직조하듯 엮어 형태를 만들어 내는 지승공예가 있다. 인사동 거리를 걷다보면 쉽게
볼 수 있는 오색함이나 태극무늬 상자는 전지공예에 해당된다. 특히 전지공예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다는 오색전지공예의 맥을 이어가는 김인숙(46)
씨를 만나보았다.
실용성과 예술성 겸비
작업실을 들어섰을 때 가장 눈에 띈 것은 한쪽 벽면에 자리한 풀색 농이었다. 기하학적문양과 화병무늬로 꾸며진 3단 농이었는데 기존에 보지
못했던 것이라 눈길을 끌었다. 그런데 그것이 종이로 만들어졌다는 말에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김 씨는 “종이를 약하다고 생각하지만 여러 겹 배접하면 화살도 뚫기 어렵다”면서 “전지공예품은 견고하면서도 가벼운 것이 장점”이라고 말했다.
그만큼 튼튼하면서도 색이 고와 실용성과 예술성을 고루 갖췄다고 한다.
김 씨는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사각형 또는 팔각형 합 제작 과정도 설명해 주었다. 우선 한지를 20∼30장정도 배접해서 합지를 만들거나
나무로 기물의 골격을 만든다. 때에 따라 하드보드지를 이용하기도 한다. 그 후에 흰 한지를 2∼3겹 입히고 윗면에 작품에 필요한 색한지를
붙인 뒤 오려진 문양으로 장식한다. 근래에는 스테이플러로 문양 둘레를 찍어 고정시키기도 하지만 원칙적으로는 밀풀이나 쌀풀을 사용한다. 혹은
바늘로 구멍을 뚫어 실로 꿰매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내구성과 내습성을 위해 콩기름, 들기름, 잣기름 등을 발라주는데 요즘에는 색깔 변화가
거의 없는 래커칠을 애용한다.
“오색전지공예는 색깔이 화사하면서도 포근함과 정겨움이 느껴져요. 촌스러운 듯 하면서도 세련돼서 싫증나지 않죠.”
자료 수집 가장 어려워
종이의 발명과 더불어 시작되었을 색지공예의 정확한 기원은 알기 어렵다. 단지 고구려 영양왕 때인 601년 담징이 일본으로 건너가 종이와
먹 만드는 기술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어 한지공예도 줄잡아 1500∼1600년 정도의 역사를 지녔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현재 남아
있는 색지공예품은 조선시대 이전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가장 오래된 것이 불과 300년 안팎이다. 조선시대 중엽부터 구한말까지가 가장
성행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마저도 일제강점기와 6·25를 거치면서 대부분 소멸되었다.
“남아있는 작품이 별로 없어 자료 수집이 가장 어려웠죠”라며 김 씨는 처음 색지공예를 시작했을 때를 회상했다. 유명 골동품상의 아들이었던
상기호(53) 씨와 결혼한 후 김씨는 부군과 함께 한지공예를 시작했다. 공예품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면 지방 어디든 달려가 작품을 사왔다.
비싸게 주고 산 작품을 뜯어보며 부부는 10년 남짓 한지공예를 연구했고 상대적으로 빚은 늘어갔다.
“그때 우리에게 있는 재산이라곤 남들이 보기엔 아무 쓸모없는 낡은 골동품뿐이었죠.”
대학에 한지공예과 생겨야
그러나 그들의 노고는 조금씩 빛을 발했고 제일 먼저 문화재 관계자들이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왔다. 그리고 전국에서 배우겠다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하지만 모든 이들을 다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돈벌이에만 급급한 사람들은 받지 않죠. 작가정신이 필수돼야 합니다.”
김 씨는 전통방식 그대로 수업한다. 원칙을 알아야 변형도 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또 사라져가는 전통을 지키고 보급해야한다는 사명감이
크기 때문이다. 제대로 배우기 위해서는 3∼4년이 걸리는데 그 기간을 수료하는 학생은 처음 10명 중 4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끝까지 하는 수료생들은 공예품을 단순한 ‘물건’이 아닌 ‘작품’으로 보기 때문”이라며 김 씨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자신이 만든 작품을
보고 흐뭇해하며 잠들기가 여러번”이라고 색지공예의 매력에 빠진 사람들의 공통된 ‘증상’을 말한다.
최근에는 교육청에서 한지공예의 보급을 위해 매 방학마다 30명의 교사를 선발, 김 씨에게 교육받게 하고 있다. 과정이 끝나 중급정도의 실력을
갖춘 교사들은 학교 특활시간에 한지공예를 가르친다. 그 중에는 아예 방학기간이 끝난 후에도 지속적으로 배우러 오는 경우도 있다.
“점점 이 분야에 관심갖는 이가 많아져서 다행이에요. 곧 대학에도 한지공예과가 생기길 기대합니다.”
딸에게 전수할 터
김 씨는 오는 8월 운현궁에서 개인 전시회를 갖는다. 궁에서 하는 만큼 선정요건이 까다로운데 김 씨가 당당히 선발된 것이다. 그간 힘들게
작업해 온 노력에 대한 약간의 보상이다. 개인전에는 유물 재현작을 포함해 김 씨의 대표작들이 총 망라된다. 특히 정교한 문양이 돋보이는
색실상자와 지승기법으로 제작한 반야심경이 전시된다.
“반야심경을 작업할 때 지문이 두 번 벗겨졌죠. 한 글자를 만드는 데 30분이 소요됐고 전체를 완성하는 데는 꼬박 1년이 필요했어요.”
김 씨는 자신이 가르친 학생들이 공모전에 입상할 때도 자신이 상받는 것처럼 보람있다고 말한다. 정기적으로 제자들과 전시회도 열고 있다.
“상품성과 작품성은 완전히 합치될 수 없습니다. 저는 보급에 치중하기 때문에 전통을 고수하지만 상업성에 중점을 두는 분들도 조금은 원리를
이해하고 상품화했으면 좋겠습니다. 눈 가리고 아웅 식으로 날림하면 결국에 작가들의 작품도 매도되고 그러다보면 맥이 또다시 끊길 수 있거든요.”
김 씨는 마구잡이 식으로 대량생산되는 공예품에 대한 우려도 잊지 않았다. 한지공예의 남다른 애착이 느껴졌다.
현재 부군 상기호 씨는 국내 유일한 건칠지불(한지로 만든 불상) 작가다. 몸이 좋지 않아 작품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지 못하지만 완쾌되는
대로 제자 양성에 주력할 것이다. 특히 아들에게 전수할 계획이다. 마찬가지로 김인숙 씨도 오색전지공예를 딸에게 전수할 예정이다.
“나중에 가족 전시회도 생각해 볼 만 하겠죠?”라며 웃음짓는 김 씨는 “마음만은 부자”라고 강조한다. 다만 조금 더 욕심을 낸다면 부군과
함께 최초의 한지공예분야 인간문화재로 지정되고 싶다고 한다. 오랫동안 가슴속에만 품어온 꿈. 조금씩 그 꿈을 내보이고 있는 김 씨는 오늘도
작업실 한구석에서 한지를 붙이고 있다.
안지연 기자 moon@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