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기 싫거든 현실을 직시하라!
한국은 지금, 경제불황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제로시대’
근자에
들어 돈이 되는 일은 부동산 투기밖에 없다고 한다. 금리는 밑바닥을 기어다니고, 취업을 못해 허우적대는 졸업생들이 거리를 배회한다. 기업에서는
‘사오정’ ‘오륙도’라는 유행어가 생겨날 정도로 “45살이 정년”이고 “50∼60살까지 직장에 남아있으면 도둑”이라고 한다. 그런데도 시간을
벌 수 있는 분장술과 임기응변식의 대책들만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에 “현실을 직시하라”며 날카롭고 냉철한 목소리를 내는 책이 출간됐다.
눈 먼 정부와 금융 관계자 탓
한불종합금융(주) 투자금융본부장을 역임하고, 싱가포르에 있는 소시에테 제네랄 은행에서 아시아 및 대양주 지역본부 심사역으로 국제 금융계에서
활동한 지은이 유경찬은 불황의 늪에 빠진 한국경제의 책임을 “한치 앞도 분간하지 못하는 근시안적이고 구태의연한 정부와 금융 관계자들”에게
묻는다. 저자는 “논 팔아먹은 큰아들 놈, 집 팔아먹는 작은아들 놈”이라고 그들을 비꼬면서 내실을 기하지 않고, 그저 앞으로만 달려가는
사회풍조에 일침을 가한다. 1990년대 ‘세계화’라는 전 지구적인 움직임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의 경제환란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세계화는 한국의 농산물시장에서 뉴욕의 증권시장에 이르기까지 나름대로 폐쇄적 활동공간을 유지하던 자본주의의 울타리를 제거했다. ‘초식동물’로
비유되는 산업자본주의를 ‘육식동물’로 비유되는 미국의 금융자본주의가 잠식해버린 것이다. 여기에 위축된 경기를 부양한답시고 신용카드와 현금대출을
늘리면서 ‘뭣 모르는’ 우매한 대중들은 무비판적으로 ‘남들 다 한다고’ 따라하다 ‘카드채 환란’의 희생자가 됐다.
가진 돈이나 지켜라
카드채 환란은 소비자 금융 폭발을 의미한다. 1980년대 농업 금융 부실, 1990년대 기업 금융 대란에 이어 이제는 소비자 금융이 무너지고
있다. 소비자를 죽이는 또 하나는 바로 ‘제로금리’다. 저자는 “IMF 이전까지는 10% 내외이던 은행 금리가 점차 하락해서 결국 금리가
제로로 떨어지면, 우리나라는 이제껏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디플레이션, 즉 장기 불황의 시대로 들어갈 것이다”라고 경고한다. 하지만 이미
‘제로시대’는 시작됐고, “5억원을 은행에 예금해 놔도 생활비가 나오지 않는다”며 불평을 늘어놓는 시기가 대두됐다. 이젠 더 이상 “돈
더 벌 생각은 말고, 가진 돈이나 지켜야”하는 상황이다.
저자는 제로시대는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시대적 요청으로 불가항력적이라고 지적한다. 때문에 ‘언젠가는 금리가 다시 올라갈 것’이라는 맹목적인
낙관을 버리고 현실을 빨리 직시하라고 한다. 원인과 과정을 알아야 대책이 서리라는 생각에서다.
‘성장의 정체 → 취업전선의 붕괴 → 소비자와 투자의 실종’은 이미 제로시대를 나타낸다. 그리고 제로시대는 단지 경제분야에만 미치는 단발적
영향이 아니라 머지않아 정치 사회 문화 등에도 일파만파 퍼져 나갈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부실채권, 회계부정, 노사분규와 개혁 등 끝없이
파문을 던지고 있는 요소들에 저자는 통감하며, 어서 문제의 핵심을 정확히 이해하라고 역설한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되어 여기에 이른 것인지
일목요연하게 제시하면서 빨리 적응하는 지혜를 가질 것을 요구한다.
안지연 기자 moon@sisa-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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