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전 IMF 외환위기 당시 몰아닥쳤던 구조조정 한파가 다시 되살아나고 있다. 젊은이들은 대학을 졸업해도 갈 곳이 없는 ‘청년백수’ 딱지를 달고 직장인들은 감원바람에 몸을 사리고 있는 실정이다. ‘88만원 세대’의 고통은 그나마 일자리가 있다는 안도감으로 변했고 비정규직의 설움은 배부른 투정에 불과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고 어두운 경제 터널을 지나는 동안, 얼마나 많은 고통이 따를지 알 수 없다.
MB정부 취업자 증가수 반토막… ‘최악’
수도권 대학을 지난해 졸업한 김영란씨(27세)는 “취업을 위해 대학 2학년부터 어학연수에 취업과외를 하고 각종 자격증을 따놓았지만 불러주는 곳은 없다”며 “눈높이를 더 낮춰서라도 올해는 꼭 취업하고 싶다”고 푸념한다. 대학가에서는 보다 좋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 휴학을 하고 취업을 연기하거나 군대를 가기보다 눈높이를 낮춰서라도 올해 안에 취업을 하고 보자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다.
서울 북창동 98번지는 대표적인 인력시장 중 하나다. 요즘 이곳은 경기침체로 올해 혹독한 겨울을 맞고 있다. 새벽에 일자리를 찾는 구직자가 요즘 보통 100명을 넘어섰지만 일감을 잡는 ‘행운아’는 불과 10명에 불과하다. 일용직 노동자 최영국 씨(67세 가명)는 “북창동 인력센타에 나온 지 43년이 됐지만 지금같은 불황은 처음 본다”며 “새벽 4시에 나와서 기다려봤자 일감을 잡는 경우는 하늘의 별 따기 만큼 어렵다”고 한탄한다.
지방노동청 고용지원센터엔 실업급여를 타러 오는 실직자가 부쩍 늘었다. 서울지방노동청 서부종합고용지원센터에 실업급여를 신청한 신청자는 지난해 동기 대비 15% 증가했다(하루 120~180명). 실업급여를 받는 동안 재취업에 성공한 사람은 4명 가운데 1명꼴이다. 지난 10월 실업률은 6.5%, 실업자가 1000만명을 넘어섰다.
현 정부가 출범초기 20만명의 취업자를 증가시키겠다고 했지만 지난달 취업자 증가수는 9만7000여명으로 실업대란이 현실화되고 있다. 고용사정의 악화는 당장 지표에서도 확인된다. 통계청의 고용동향에서 10월 취업자 증가수는 10만명 아래로 떨어지면서 3년8개월 만에 최저를 기록했다. 취업자 증가수는 이미 지난 3월부터 20만명 아래로 떨어졌지만 미국 투자은행 리먼 브라더스 파산으로 본격화된 금융위기 이후인 10월엔 9만7000명으로 추락했다.
국내 실정은 서서히 그 여파를 실감하고 있는 중이다. 자영업자의 폐업이 늘면서 종업원들 일자리도 대폭 줄었고 일용직 근로자들도 일거리가 없이 빈손으로 돌아오기 일쑤다. 한때 잘나가던 화이트칼라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은 금융권에서 시작된 감원 한파가 최근 제조업체에서, 건설업계까지 ‘쓰나미’처럼 몰려오고 있다. 경기한파의 영향은 업종과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해고·감원·명퇴바람 분다
기업들은 경영난을 우려해 채용계획을 취소하거나 대폭 축소하고 정부도 공무원 임용을 줄이고 있는 실정이다. 잡코리아가 국내외 주요 기업 인사담당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올해 채용인원을 기존 계획보다 축소(27.8%), 또는 포기(17.6%)했다고 답했다.
실업한파의 진원지는 금융권에서 시작됐다. 글로벌 금융권에서 감원 열풍이 불어닥치고 있는 가운데 국내 금융권도 인력을 대폭 축소하고 있다. 금융·보험업종의 취업자수는 올들어 8월까지 전년 동기 대비 증가세를 보였지만 9월 1000명 준데 이어 10월에는 1만9000명이나 급감했다. 상용직 근로자는 구조조정 단계가 아니지만 은행 텔러나 카드 상담원, 보험 영업인력 등을 중심으로 감원 바람이 본격화되고 있다.
증권업계도 마찬가지. 국내 증권사 중 올해 6곳이 인원을 줄였다. 증시 부진으로 인한 실적 저하로 신음하는 국내 증권사들이 대단위 인원감축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하나대투증권은 외환위기 이후 처음으로 150명 규모의 명예퇴직을 받고 있다. 현대·대신증권은 신규채용을 무기 연기했고 미래에셋·동양·삼성증권은 절반 이하로 줄였다.
제조업계도 감원 칼바람을 피하지 못했다. 쌍용차는 최근 사내 협력업체 직원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실시했다. 르노 삼성은 팀장급 이상을 대상으로 명예퇴직을 받는 방안을 검토 중이고 현대·기아차는 연말 인사 때 임원급 30%를 감축하고 조직을 통폐합하는 안을 고려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실업공포 확산
미분양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건설업계도 인력 축소가 본격화하고 있다. 채권기관인 은행들이 정상화될 가능성이 있는 건설사들만 골라 지원키로 했기 때문이다. 한 취업통계에 따르면 중소기업 10곳 중 3곳이 이미 채용 규모를 줄인 것으로 나타났다. 철강구조물 생산 2위인 한신스틸콘과 철강 수입업체인 삼보철강은 지난 10월 부도가 나면서 직원들이 일자리를 잃게 됐다.
하지만 앞으로가 더 문제다. 경기침체 진입 초기에 불과한 지금도 이런데, 경기악화가 본격화하면 ‘실업대란’으로 혼란이 우려된다. 세계경기 침체의 골이 깊어지고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내년에는 실업공포가 갈수록 심해질 전망이다. 해외의존도가 높은 한국으로선 미국의 경기여파를 그대로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미 세계최대 무역국인 미국은 14년 만에 실업률이 최악의 상황에 치닫고 있다. 미국은 금융위기로 월가에서 17만명 이상이 퇴출된 것을 비롯해 자동차 공장 폐쇄 등 곳곳에서 감원 바람이 확산되고 있다.
손민중 삼성경제연구소 연구원은 “현재는 조업시간을 줄이는 등 탄력적으로 대응하는 초기 단계지만 문제는 내년에 실물 침체가 심화될 수 있다는 점”이라며 “특히 우리 경제 구조에서 견고한 계층을 형성하고 있는 상용근로자마저 해고되면 그 충격은 과거 외환위기처럼 걷잡을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
정부는 ‘국토해양부문 일자리 창출 대책’을 통해 내년 5만개의 신규 일자리를 창출하기로 했지만 제대로 될 지 의문이다. 실물경기가 워낙 위축되고 기업의 투자심리 역시 꽁꽁 얼어붙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은 “실업률이 내년 상반기 3.7%로 확대돼 고용사정이 더 악화될 것”으로 전망하면서 “내년에 내수 침체로 취업자 증가폭이 10만명 안팎에 머물 것”으로 예측했다. 실업은 소득상실에 그치지 않고 소비감소, 대출 부실로 이어져 경기침체와 금융경색을 부추겨 추가 구조조정이란 악순환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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