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석보다 빛나는 열정
전통문양의 현대화, 귀금속공예 대가 이정훈 선생
서울시
은평구 녹번동의 어느 다세대 주택 지하. 장마철이라 습기도 차고 이렇다할 가구도 없어 휑그렁한 방에 빛을 발하는 무언가가 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금과 은으로 정교하게 만들어진 반지 귀고리 팔찌 비녀 등이 정갈하게 놓여있다. 처음 보는 디자인과 섬세한 아름다움에 넋을 잃고
감탄하고 있는 사이 옆 시선으로 또 다른 무언가 빛나는 것이 보인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니 희끗한 머리에 깔끔한 옷차림을 한 노인이 서있다.
인자하게 웃으며 음료수를 건네는 그는 바로 귀금속공예 명장 이정훈(69) 선생이다.
도안에서 제작까지 혼자 척척
“이곳은 내가 작업실로 쓰는 곳이야. 번화가에 있으면 방해하는 사람들이 많아 조용한 곳을 택했지. 작품 구상과 제작에 맘껏 몰입할 수 있어
좋아. 그런데 여기에 숨어있는데도 어떻게 알고 찾아오는지…. 그래도 날 찾아온 손님이니까 이야기를 잘 해줘야겠지?”
초반부터 시간을 많이 뺏지 말라는 듯 선수를 친 이 선생은 그러나 대화를 시작하자 차근차근 자세히 설명해줬다.
“나도 만들만큼 만들어 봤지만 요즘 쥬얼리는 화려하기는 해도 그 안에 의미가 없어. 하지만 우리나라 선조들은 귀금속 문양 하나에도 의미를
담았지. 나이가 드니까 가벼운 건 싫더라고. 그래서 5∼6년 전부터 전통 장신구만 본격적으로 하게 됐어. 매화는 오덕(五德), 즉 쾌락
행복 장수 순리 절개를 나타내고, 박쥐는 박쥐를 나타내는 한자 ‘복’자가 복 ‘복’자와 발음이 같다고 하여 같은 의미로 사용돼지.”
난초는 자손 번창을, 국화와 대나무는 절개를 상징한다. 이 선생은 전통문양을 재현하되 변형 과정을 거쳐 자신만의 개성적 무늬를 창조한다.
자료수집을 통해 연구하고 그것을 자기화한 디자인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전통 귀금속을 전문으로 하는 디자이너가 없기 때문에 이 선생이 직접
모든 것을 한다.
“디자이너에게 도안을 청탁하면 디자인은 그럴 듯 한데 막상 만들 때 어려움이 많아. 제대로 모르니까 아무래도 그런 장애가 있더라고. 또
손수 만드는 사람만큼 자세하지 못해. 도안은 그림이 아니라 설계도로서의 역할을 해야하는데 말야.”
‘주물기법’ 고안, 능률 향상
문양 제작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고각’과 ‘금부’인데, ‘고각’은 문양을 따로 입체감 있게 만든 후 반지나 목걸이에 양각으로
덧붙이는 방법이다. 세세한 문양을 조각조각 연결해 만들어야 하므로 시간이 오래 걸려 고각반지의 경우 한 개를 만들려면 꼬박 하루가 걸린다.
‘금부’는 문양을 집어넣을 부분에 홈을 파고 그 부분에 금이나 은을 넣은 후 그 상태에서 조각을 새기는 방법이다. 금부반지의 경우는 반나절이
걸린다.
“고각도 어렵지만 칠부를 녹여 입히는 것이 가장 힘들어. 이건 이틀이나 걸리지. 또 얼마나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고. 아무리 높은 양반이
와도 절대 못 주는 거야.”
모든 작업이 수작업으로 일일이 조각해야하기 때문에 다량생산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 선생은 문양의 틀을 만드는 시간을 최대한 절약하기 위해
‘주물기법’을 고안했다. 은으로 만든 원판을 고무 사이에 끼우고 열을 가하면 고무판이 녹아 은에 새겨진 모양대로 홈이 만들어진다. 그러면
그 고무판에 양초를 부어 떠내고 이것을 주물통에 넣어 석고물을 붓는다. 석고가 굳으면 열을 가해 양초를 녹아 없애고 이 석고틀 안에 금이나
은 녹인 물을 부어 굳히면 문양이 만들어진다. 만들어진 문양에 좀더 세세한 조각과 다듬는 작업을 하면 완성된다. 주물생산은 이 선생이 귀금속업계
최초로 시행·전파한 것으로, 오늘날 100배 이상의 능률을 올리는데 기여했다.
K18,
K14 개념 확립
이 선생은 ‘주물기법’ 외에도 업계 발전을 위해 많은 공헌을 했다. 1966년 국제기능올림픽 한국위원회가 발족되자 1회부터 8회까지 관리위원과
심사위원직을 맡았고, 1968년에는 김포공항 내 미군부대에 있는 하비 숍에서 우리나라 최초로 주얼리 전시회를 가졌다. 한국귀금속공예협회를
창설하고, 각 지방 명장대회 심사를 맡아 일류 기술진을 배출한 것은 차치하고라도 선생이 열악한 환경의 세공업계에 기여한 노력은 대단하다.
국산이 없어 외제 수입에 의존하던 세공공구를 만들어 보급도 했다. 아직까지도 유용하게 쓰이고 있는 꼭두망치와 외망치가 그것인데,꼭두망치는
금을 늘일 때 쓰이고, 외망치는 철을 가늘게 뽑을 때 사용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금합금의 정확한 측정치를 실현시켜 K18, K14의 개념을 확립한 것이 가장 큰 기여라 하겠다. 1962년 당시에는 누런
색은 순금, 아니면 K18라는 개념이 통영되던 시기였다. 정확히 측정하는 전문가가 없었기 때문인데 이 선생이 이것을 바로 세우고 그 방법을
교육시켰다.
“장신구를 만드는 기술자만 있었지 금분석이나 금합금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어. 모르니 속고 속일 수밖에. 이러면 안되겠다 싶어 순도를
정하고 업주 측과 협의해 정착시켰지.”
이러한 일이 가능했던 것은 이 선생이제조·공정 모든 분야에 능통하기 때문이다. 1948년 16세부터 15년간 김진용, 이남재, 이승만 선생에게
각 단계를 수학했고, 강도가 다르기 때문에 세공법도 다를 수밖에 없는 모든 세공법을 마스터했다.
“내과 외과 치과가 다르듯 순금 백금 K18 은의 세공방법도 달라. 대부분은 한 분야만 파고들지만 난 모든 과정을 다 배웠어. 그래서 전통
귀금속 세공이 가능한 거고.”
일은 한시도 떠날 수 없는 ‘애인’
전통 귀금속 공예에 대한 열의도 대단하지만 이 선생은 창작에 대한 포부도 매우 크다. 1969년 디비어스 작품 수록집을 접했을 때의 충격을
아직도 못 잊기 때문이다. 2년마다 세계 각국으로부터 디자인을 응모 받아 상을 주는 디비어스에 출품된 작품들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당시에 반지는 모두 둥글다고 생각했는데 작품집을 보니 고정관념이 깨지더라고. 네모난 모양도 있고 세모 모양도 있었지. 더 새롭고 더 창조적인
것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 계기가 됐어.”
고령의 나이에도 이 선생이 지금껏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창작에 대한 열정 때문이다. 친구 만날 시간도, 술 한잔 걸칠 시간도
없다는 선생은 작품에만 모든 시간을 할애한다. 간혹 휴식이 필요할 때면 산에 올라 자연을 보면서 구상도 하고 마음을 정제시킨다. 모두 일의
연장이다.
“이 일은 나에게 먼저 떠난 부인을 대신해 애인 같은 존재야. 너무도 사랑해서 한시도 떠날 수가 없지. 전통의 문양을 현대화해 한국의 미가
물씬 느껴지면서도 현대인이 좋아할 장신구를 만드는 것이 내 사명이야. 대학에서 강의 제의가 들어오지만 못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어. 난
실전에서 뛰어야 하거든. 여든이 될 때까지는 일만 할거야.”
말을 마치고는 이 선생은 곧 무주에서 개최될 전통공예한국대전 출품작을 다듬기 시작했다. 선생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보석은 더욱 빛을 발했다.
하지만 보석보다도 이 선생의 눈이 더 반짝였다. 50여년 한길을 걸어온 명장의 마르지 않는 열정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안지연 기자 moon@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