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증명하는 천재수학자의 딸
인간관계의 양상, 수학적 언어로 풀어낸 연극 ‘프루프’
각국을
순회하며 환호와 갈채 속에 공연된 연극 ‘프루프(proof)’가 국내 무대에 올려져 화제다. 수학적 공식보다 인간관계의 함수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아는 천재수학자의 딸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이 작품은, 영화 ‘뷰티풀 마인드’의 천재수학자 ‘존 내쉬’를 모티브로 쓰여졌다. 천재적인
수학자의 상당수는 정신병으로 고통을 겪었다는데 착안, 그의 딸 이야기로 발전시킨 것이다.
극단 천지인과 (주)루트원이 공동제작해 9월28일까지 제일화재 세실극장에서 선보이는 이번 공연은 원작의 명성에 5년만에 정극 무대에 서는
추상미의 출연과 국내 연극계에서도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과학극이라는 점까지 더해져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
세계를
휩쓴 화제의 연극
데이비드 어번의 연극 ‘프루프’는 놀라운 흥행성적으로 미국 연극계를 떠들썩하게 했으며 시애틀,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LA, 시드니, 런던,
도쿄, 마닐라, 스톡홀름, 텔아비브 등 각국의 도시에서 호평을 얻었다. 퓰리처 드라마상을 포함해 대부분의 어워드에 수상· 노미네이트 됐고,
토니상 후보로 전 배역이 모두 노미네이트 되는 기염을 토해냈다. 뿐만 아니라 20년만의 브로드웨이 최장기 연극(918회)으로 기록되는 영예까지
안았다.
현재 새로운 캐스팅으로 브로드웨이에서 재공연될 예정이며 웨스트엔드 연극무대에서 ‘캐서린 역’으로 열연했던 기네스 펠트로 주연으로 헐리우드
미라맥스 필름에서 영화하하기로 결정된 상태다.
원작의 이력에 걸맞게 국내 출연진도 화려하다. 주인공 캐서린 역으로 개성이 강한 추상미와 정통연극배우로 이미 연기력을 인정받은 장영남이,
로버트 역은 연극계의 역사 전성환, 클레어 역에는 안정된 연기로 유명한 추귀정, 할 역은 ‘보이체크’에서 열연했던 장현성이 캐스팅 됐다.
연출은 연극 ‘인류최초의 키스’ 뮤지컬 ‘베르테르’ 등으로 알려진 김광보 감독이 맡았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흥미로운 시간 구성
‘프루프’는 천재지만 정신적으로 문제를 가진 수학자 아버지(로버트)를 돌보아 온 젊고 매혹적인 여인 캐서린에 관한 이야기다. 연극은 로버트의
장례식 전날 밤으로부터 시작된다. 이 날은 마침 캐서린이 25번째 생일을 맞는 날이다. 캐서린은 아버지와 함께 지내던 집의 뒤편 테라스에서,
아버지의 생전 제자인 할이 유품으로 남겨진 백 여권의 노트 속에서 가치 있는 연구물을 찾고 있는 작업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캐서린은 뉴욕에서 금융분석가로 성공한 그녀의 언니 클레어의 방문을 꺼린다. 클레어는 캐서린이 그의 아버지를 닮아 뛰어난 수학적 재능을 보이고
있지만 역시 아버지처럼 정신적으로 불안정해질까봐 노심초사한다.
이야기는 캐서린과 할 사이에 로맨틱한 감정이 싹트면서 복잡해진다. 캐서린은 할에게 뛰어난 수학적 증명이 담긴 노트가 있는 곳을 알려주고
그것이 자신의 연구 결과임을 밝히지만, 할과 클레어는 그녀의 주장을 의심한다.
과연 그 증명은 누가 해낸 것인가? 이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방법은 흥미진진하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시간 구성은 추리적 호기심과 미스터리를
고조시킨다. 동기, 진행, 결말이 원하는 방향으로 일목요연하게 진행되는 치밀한 구성은 완성도가 무척 높다. 대사는 현실감이 넘치면서도 극적
짜임새가 탄탄하다. 공연의 흐름을 깨는 단 하나의 대사도 없다.
원작의 위력이 연극의 반 이상을 차지
이 연극은 천재 수학자의 성공 과정에 대한 것이 아니다. 가족들간의 인간관계와 감정을 긴장감 넘치는 구조 안에 담은 가족 심리극에 가깝다.
원작자 데이비드 어번은 “모든 사람들이 가족끼리 사랑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걱정과 희망을 동시에 가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유전적인 면에서
어떤 것은 닮고 싶지만 어떤 것은 피하고 싶어하는 그런 것 말이다”라고 말했다.
캐서린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천재적 수학능력을 부정한다. 그녀는 아버지의 광기까지 물려 받았을까봐 두려워하는 것이다. 캐서린의 언니 클레어
또한 캐서린과 다른 성향으로 충돌한다. 하지만 이들을 묶어주는 것이 사랑인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플레쉬백으로 과거가 점차 드러나면 인간관계의
미묘한 감정은 보다 분명해진다.
아버지 로버트는 정신적 광기로 요절하기 전 103권의 노트속에 캐서린과 할 사이에 싹트는 로맨틱한 감정과 두 자매의 혈연 관계를 시험하는
정확하고 뛰어난 수학적 결과를 남긴 것이다. 그리고 캐서린은 자신과 너무도 닮은 아버지를 사랑했다.
‘프루프’는 가족에 대한 성찰과 동시에 한 천재 여성의 독립적 세계관을 그려낸다. 그리고 곁가지로 연령의 한계에 대한 두려움 등 수학자들의
이야기도 담았다. 수학적 언어를 예술적 언어로 우아하게 환치하는 장면이나, 수학적 언어로 철학을 논하는 대목은 상당히 새롭고 아름답다.
가장 아쉬운 점은 결말의 성급한 마무리로 인해 잘 유지돼 왔던 긴장감이 단번에 깨지는 것. 한국적 정서에 맞지 않는 부분이 많은 것도 단점이다.
어려운 캐릭터를 절제된 연기로 표현한 장영남과 양념 같은 웃음을 주는 장현성의 연기가 돋보인다. ‘프루프’는 무엇보다 원작의 위력이 연극의
반 이상을 이끌고 있다.
정춘옥 기자 ok337@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