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냄새 사람냄새 가득한, 그곳에 가고싶다
추억과 인정이 숨쉬는 용산역 헌책방 ‘뿌리서점’
용산역
‘용사의 집’ 뒷골목. 사창가가 즐비한 역 앞이나 사람이 북적대는 전자상가와는 너무도 다른, 고독감마저 자아내는 한적한 길에 낡은 책들이
덩이째 묶여 거리에 나와있다. ‘책이 주인을 기다립니다!’라고 붓글씨체로 쓰여진 조그만 철제 간판이 입구임을 알리는, 그 밑으로 두 명이
지나가기엔 역부족인 좁다란 계단이 지하로 향해있다. 계단에늘어선 비디오테입이며 LP판, 헌책들을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쾌쾌하지만 싫지 않은
책 곰팡내가 가장 먼저 맞이한다.
책과 함께 하는 좋은 친구들
손님이 오자 반갑게 인사하며 음료수를 따라주는, 인상 좋은 중년의 남성이 이곳 헌책방 ‘뿌리서점’의 주인인 듯 했다. 도수가 높아보이는
두꺼운 안경이 자꾸만 코끝으로 흘러내려 고개를 약간 뒤로 젖히며 시선을 두는 주인 김재욱(59) 씨. 분주하게 책정리를 하면서도 행여나
손님이 불편한 일은 없는지 자주 두리번댄다. 단골인 듯 친근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머리가 희끗한 남성이 김씨 옆으로 다가가 찾는 책이 있는지
물어본다. 김씨가 얼른 찾아서 전해주자 손님은 복권에 당첨된 양 유쾌한 웃음을 짓는다. “오늘은 운수가 좋네”하며 감격하는 손님은 손용해
씨다. 1주일에 두세 번 이곳에 들른다는 그는 방금 손에 전해진 책을 봉투에 담는다. 김씨가 가격을 책정하자 두말 없이 이내 돈을 치른다.
싸게 달라는 말도 없다. 어련히 알아서 해줬겠냐는 믿음 때문이다.
“처음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주인양반이 좋아 계속 와요. 다른 데보다 책도 많고요. 얼마 전에는 절판돼서 구하기 힘든 김영상의 ‘서울 600년’을
사는 재수도 있었죠. 그래도 뭐니뭐니 해도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게 이 집의 최고 매력이에요.”
자주 들르다보니 그때마다 보게되는 얼굴이 있고, 그러다 친분이 쌓여 이제는 ‘책사모’라는 모임을 결성해 한달에 한번 정기적으로 토론도 하고,
희로애락도 나눈다는 손씨는 다양한 군상을 접할 수 있다는 것을 가장 큰 기쁨으로 꼽았다.
“정도 나누고 지식도 쌓고, 헌책방만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이죠.”
인연이 꿈틀대는 곳
헌책방이
주는 즐거움 중 또 하나는 새책방에서는 느낄 수 없는 ‘인연’의 소중함이다. 무엇을 살지 미리 정한 뒤 살 것만 사고 가는 것이 아니라
헌책방을 찾는 많은 손님들은 우선은 와서 쭉 둘러보다 맘에 드는 걸 구입한다. 찬찬히 어떤 책들이 있는지 훑어보다 보면 그동안 잊고 있었던
책들이 눈에 띈다. 그간 소원했던 인연이 다시 연결되는 것이다. 때로는 바라던 책이 눈앞에 있는데도 그냥 지나쳐 인연이 빗겨가기도 하지만,
간혹 다른 손님이 찾아주기도 하고, 계산하는 것을 기다리다 우연히 발견하기도 한다.
“보고싶다고 생각했는데 그 동안 잊고 있었던 책들을 여기서 다시 만날 때가 있어요. 그럴 땐 ‘어, 이 책은!’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죠.
연락이 끊겼던 친구를 만난 기분같아요. 가격도 싸니까 부담도 적어 냉큼 구입하죠.”
소설책이 쌓여있는 책장을 가만히 둘러보던 한 중년 남자 손님의 말이다. 그런데 그가 말하는 ‘인연’은 다만 책과의 만남만 의미하지 않는다.
“몇 해 전 전자상가에 왔다 길을 잘 못 들어 우연히 이곳을 알게됐죠. 그 이후론 집이 수원인데도 다른 서점엔 안 가고 여기만 와요.”
배려와 이해를 배우다
저녁 무렵이 되자 손님의 발걸음이 잦아졌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한 남학생이 주인을 찾았다. 안면이 있는 양 익숙한 인사를 주고받더니 그
학생이 가방을 열었다. 컴퓨터 관련 책을 팔러온 것이다. 전화번호부만큼 두꺼운 책 4권이 책상 위에 올려졌다. “이런 전문서적은 우리집보다
청계천 6가를 가야 제값을 받아. 우리는 많이 못 쳐줘”하면서 김씨가 미안한 듯 말을 꺼냈다. 그래도 괜찮다는 듯 학생이 책을 밀었고,
가격은 만원으로 정해졌다. 너무 헐값이 아닌가하는 의심도 들었지만 작년 것도 구닥다리 취급받는 컴퓨터 관련 서적이라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사실 그 책은 2000년에 출판된 거라 김씨는 못 팔 걸 예상하면서도 자주 오는 손님 것이니 사들인 거였다.
김씨가 방금 구입한 책을 가격매기는 동안 단골손님들간의 대화가 들려왔다. 천상병 시인의 부인 이름이 궁금해진 모양이었다. ‘목순옥’이라는
해답을 찾는 동안 또 다른 단골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하며 천상병 시인의 ‘귀천’을
낭송했다. 그렇다고 어느 손님 하나 조용히 하라며 인상을 찌푸리는 이없다. 모두 웃으며 그 분위기를 즐기고 있는 듯 했다.
“모든 책에는 나름의 가치가 있다”
한 쪽 구석에는 6년 단골손님
이 열(63) 씨가 LP판을 고르고 있었다.
“요즘 노래는 통 느낌이 안 와. 젊었을 때 듣던 노래가 지금 들어도 좋지. 주로 올드 팝을 사가는데 가끔 사장이 공짜로 주기도 해. 꼭
그래서 그런 건 아니지만 주인양반, 사람 참 좋아.”
턴테이블로 듣는 음악이 좋다며 이씨가 앨범을 사가고 난 뒤 ‘선택’을 미처 받지 못한 LP판들 사이로 ‘잊혀진 계절’이 수록된 이 용의
1집 앨범이 눈에 들어왔다. 커다랗게 인쇄된 이 용의 젊은 시절 얼굴이 시간의 흐름을 말해주는 듯 했다.
책방 한가득 들어찬 책들도 세월을 상기시키긴 마찬가지였다. 누렇게 변색된 책들이며,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베스트 셀러들이 과거를 속삭였다.
또, 곳곳에 발견되는 낙서나 ‘20번 째 생일을 축하하며’ 등의 메모가잔잔한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헌책방에는 정이 꿈틀댄다. 한때 사랑 받았던 책도 있고, 태어나 지금까지 사랑 받지 못한 책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책들은 이곳으로 오는
순간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 ‘추억’이라는 표장지가 덧입혀진 채….
“누군가는 쉽게 책을 버리지만 나는 한권한권이 모두 아깝고 소중해요. 그래서 30년동안 이 일을 해오고 있는 지도 모르죠. 모든 책에는
그 나름의 가치가 충분히 담겨져 있어요.” (02-797-4459)
안지연 기자 moon@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