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로에서
생맥주 한잔 어때요?
신선하고 톡 쏘는 맛,
生연극시리즈 5탄 ‘돼지사냥’
생맥주와 병맥주의
차이점은? 정답은 열처리를 했느냐 안했느냐다. 열처리를 한 것이 병맥주, 안한 것이 생맥주인데, 열처리를 안 하기 때문에 효모가 살아있어
생맥주가 더 신선하다. 때문에 애주가들은 병맥주보다 생맥주를 선호한다.
극단 차이무와 동숭아트센터, 공연기획사 이다가 의기투합해 1년간의 일정으로 펼치고 있는 ‘생(生)연극시리즈’는 마치 생맥주 같다. 생맥주처럼
살아 숨쉬는 연극들로 대학로 소극장에 활기를 불어넣기 때문. ‘거기’ ‘늘근도둑 이야기’ ‘조통면옥’ ‘이발사 박봉구’에 이어 이번에는
5탄 ‘돼지사냥’의 막이 올랐다.
1장.
술은 기분을 ‘업’ 시킨다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진다. 물론, 때로는 기분이 안 좋아질 때도 있지만 지친 일상, 좋은 사람들과 마시는 생맥주 한잔은 생활의 활력소가
된다. 마찬가지로 ‘돼지사냥’의 가장 큰 매력은 웃을 일 없는 우리에게 ‘재미’를 선사한다는 데 있다. ‘늘근도둑 이야기’ ‘비언소‘로
이미 희극적 재량을 보여준 바 있는 이상우의 원작답게 연극은 시종 웃음을 머금게 한다.
생돼지고기식육식당으로 유명한 서부리에 돼지 탈옥사건이 발생한다. 밀도살도 마다 않는 억척스런 돼지할매의 300근이 넘는 씨돼지가 바로 그것.
그리고 ‘돼지’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교도소에 간 할매의 막내아들이 탈옥한 것이다. 서부리는 두 돼지 때문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돼지
뱃속에 막내아들이 훔쳤다는 다이아몬드며, 현금들이 숨겨져 있다고 믿는 무위도식자 천씨와 방씨, 그리고 탈옥수 돼지를 잡기 위해 특파된 비밀수사관이
마을 곳곳을 정신 없이 휘젓고 다니면서 아수라장을 만든다. 거기에다 군의회 출마를 앞둔 신회장과 구회장의 정치공방전과 다방처녀 가락이를
사랑하는 지서장의 이야기가 합세하면서 극은 숨가쁘게 흘러간다.
천씨와 방씨의 사투리 퍼레이드와 그들의 황당한 ‘발상전환’, 비밀수사관을 간첩으로 오인하는 일대 사건 등, 극은 개그콘서트의 각 코너들을
뒤섞어 혼합해 만든 듯하다. 더불어 천씨가 신회장으로, 방씨가 구회장으로, 돼지할매가 가락이로 순식간에 배역을 바꾸는 배우들의 민첩성은
마술쇼를 보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킨다. 시원한 생맥주를 들이켰을 때의 상쾌함이 전해진다.
2장.
쓴맛이 없으면 맥주가 아니다
그러나 맥주의 뒷맛은 씁쓸하다. 씁쓸하지 않으면 음료수지 그게 맥주겠는가. 연극 ‘돼지사냥’도 소극이 아닌 블랙코미디의 성격을 띠면서 중간중간
톡 쏘는 맛을 선사한다. 특히 정치권에 대한 비꼬기와 풍자는 통쾌하면서도 동시에 답답함을 느끼게 한다.
‘원조서부리쌩돼지고기식육식당’ 신회장과 ‘본조서부리쌩돼지고기식육식당’ 구회장의 군의회 출마를 위한 뇌물공세와 서로를 비방하는 모습은 인신공격이
난무하는 우리네 선거판과 흡사하다. 특히 ‘가락이와 부적절한 관계다’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증거물이네 하며 신음소리가 담긴 녹음기를
무기 삼아 민심을 잡으려는 행동은 해마다 잊을 만하면 터져나오는 도청사건과 얼마 전 있었던 양길승 몰래카메라 사건을 떠오르게 한다. 남을
깎아 내리면서 자신을 추켜세우는 그들, 자기네가 ‘원조식당’이라고 우기는 그들은 어느 누구도 ‘진짜’가 아니다. 거짓만이 난무한다.
정년을 앞둔 말년 경사 지서장이 중앙에서 나왔다는 말만 믿고 정체도 알지 못하는 비밀수사관에게 굽실대는 모습은 관료사회의 비굴함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자신보다 낮은 사람에게는 큰 소리 치고 봉투를 요구하는 모습은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속물의 근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아첨하는 신회장과 구회장이 진정 그를 존경하는 선배로, 둘도 없는 친구로 생각할까? 아니다. 다만 지금 당장 이용가치가 있기
때문에 알랑방귀를 뀔 뿐 효용성이 떨어지면 그들이 지서장을 거들떠보지 않을 것은 자명하다. 지서장에게 ‘행님’을 줄여 ‘햄’이라고 여러
번, 그리고 강조해 부르는 호칭은 마치 ‘ham’, 조금 과장해서 의역하자면 ‘돼지같은 놈’이라고 욕하는 것 같다.
3장.
생맥주는 관리가 생명
맛있는 생맥주를 손님에게 제공하기 위해서 주인은 맥주의 상태를 늘 점검하고 관리하는 정성을 들여야한다. 항상 냉장보관 해야하고, 2∼3일이
지나면 변질될 염려가 있다는 것을 늘 유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맥주 맛은 떨어지고 손님들은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겨버린다. 고객은
냉정하다. 단골이 많다고 방심해선 안 된다.
生연극은 이제 연극판에선 최고의 브랜드다. 연극에 문외한인 사람들도 生연극은 알 정도다. 하지만 그 때문일까? 이번 ‘돼지사냥’에서는 그
전 연극들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오만함이 느껴진다. 철저한 준비를 안한 느낌이다.
많은 부분이 할애된 큼직한 도축용 칼을 들고 “내 돼지 찾아내”하며 위협하는 돼지할매와 지서장이 벌이는 실랑이는 긴장감이나 재미 유발은커녕
오히려 극의 흐름을 자른다. 한마디로 재미없다. 관객은 ‘이 부분이 웃어야하는 타이밍 같은데’하며 웃을 준비를 하지만 영 신통치 않다.
또한 씨돼지가 주수입원이기 때문에 할매가 집착한다는 것이 이해는 가지만 그것에 대한 구체적 설명이나 또 다른 이야기거리 없이 소동만 벌이는
것은 산만하고 시간 때우기라는 오해마저 들게한다.
마찬가지로 단 한번의 등장도 없지만 극의 ‘주요인물’인 막내아들 돼지에 대한 언급도 부족하다. 어떤 인물인지 어떤 이유로 교도소에 갔는지,
꼭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관객들에게 개운함을 주는데는 방해가 된다. 이 모든 것의 가장 큰 원인은 극의 초반에 있다. 천씨와 방씨가 어두운
무대에서 나누는 대화는 씨돼지와 막내아들 돼지에 대한 설명을 담고있다. 그러나 목소리가 너무 작고 대사전달이 되지 않아 이를 100% 알아듣기
어렵다.
가락이의 요염한 몸짓이나 비밀수사관의 ‘후까시’도 너무 쇼 적인 성격만을 앞세운 듯 하다. 생각할 여지나 여운을 준다는 느낌보다 ‘뭐야?
끝난 거야?’하는 황당함을 선사하는 결론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원작을 십분 살려내지 못한 점이나 탄탄한 연기력을 갖춘 배우진들이 제 기량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 것이 가장 안타깝다. ‘生연극’이기 때문에
그 아쉬움은 더하다. 손님에게 늘 최고의 만족감을 주려면 좀 더 긴장하고 노력해야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마지막으로 관객에게 한마디! 맛있는 생맥주를 마시려면 사람이 많은 술집에 가는 것이 좋다. 계속 신선한 맥주가 공급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맥주를 팔려고 해도 손님이 안 오면 그 맥주는 김이 빠져 맛이 없어져버린다. 한 번 맛보고 맛없다고 등 돌릴 것이 아니라 자주
가고 조언해주는 것이 맛있는 맥주를 먹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연극도 생맥주와 똑같다.
안지연 기자 moon@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