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소룡 세대’의 추억담
1970년대 유신시대의 폭압적 학교 현실, ‘말죽거리 잔혹사’
‘인생의 일할을 / 나는 학교에서 배웠지 / 아마 그랬을 거야 / 매 맞고 침묵하는 법과 / 시기와 질투를 키우는 법 / 그리고 타인과
나를 끊임없이 비교하는 법…’ (유하의 시 ‘학교에서 배운 것’ 중에서)
‘말죽거리 잔혹사’는 유하 감독, 자신의 시에 등장하는 학교의 ‘모든 것’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영화는 감독의 회고록, 청춘에게 바치는
헌사다. 연출자의 자아가 작품에 투영돼 있다고 단정짓는 것은 단지 ‘말죽거리 잔혹사’의 배경과 사건이 감독의 실제 학창시절과 상당부분
일치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추억을 그림조각 맞추기 하는 듯한 애틋한 손길이 영상을 통해 전해지기 때문이다.
아프고 아름다운 성장기
‘여고괴담‘을 제외하면 한국 영화에서 학교는 줄곧 극대화된 폭력의 스펙터클이나 허황된 코미디의 공간이었다. 성장기의 대부분을 학교에서
소진하고, 성적 비관으로 자살하는 학생이 줄을 잇는 한국의 현실에서 영화는 한참을 벗어났던 셈이다.
‘말죽거리 잔혹사’는 1978년 유신말기 개발붐에 들어선 강남의 한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지금까지 도외시했던 학교 문제를 되짚는다. 오직
성적과 배경만으로 학생을 평가하는 교사들, 일상적으로 행해지는 폭력적 체벌, 또래 집단간의 권력관계, 열등감과 잡히지 않는 첫사랑, 성과
사랑에 대한 호기심 등 당대 학교의 풍경은 오늘날도 낯설지 않다. 청춘의 속성은 시대를 초월하는 것이고,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학교의
현실은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미덕은 정직함이다. ‘비트’식의 젊음에 대한 멋내기나 ‘친구’식의 우정과 폭력의 미화를 최대한 자제했다. 주인공은 별로 영웅적이지
않다. 그저 평범하고 소심한, 적당히 방황하고, 적당히 용기 있는 평범한 10대다. 그래서 결정적 상황에서도 어설프고, 진지해야 할 대목에서
코믹한 설정이 사실적이다.
이는 곧 폭력적 장면에 상당한 설득력을 부여하기도 한다. 폭력이 진정한 미학일 수 있는 이유는, 폭력이야말로 폭력에 대한 저항과 분노
표출의 수단일 수 있기 때문이다. 70년대는 폭력의 시대였고, 학교는 폭력을 가르쳤다. 스크린에서 되살아나는 ‘구타학원의 전설’은 분노를
치밀어 오르게 한다. 그리고 이 아스팔트 같은 현실에서 꽃을 피우는 청춘의 사랑과 우정은 아름답다.
학교에 대한 비극적 인식에도 불구하고 ‘말죽거리 잔혹사’는 사춘기 고등학생의 성장기인만큼 향수로 가득하다. 이소룡은 대표적 코드. 당대
10대들에게 이소룡은 음울한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판타지였다. 이루지 못한 안타까운 첫사랑도, 질투하고 시기하며 다져지는 우정도
본질적 정서는 따뜻함이다.
권상우 이정진 크로스 캐스팅
언론시사회장에서 유하 감독은 “압구정에서 말죽거리까지 오는데 10년이 걸렸다”고 말했다. 1993년 그의 데뷔작 ‘바람부는 날엔 압구정에
가야한다’ 이후 ‘말죽거리 잔혹사’를 찍기까지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는 의미다. 이 말은 ‘말죽거리 잔혹사’야말로 그가 마음속에 품어왔던
진정으로 ‘찍고 싶은 영화’였음을 강렬하게 시사한다.
완성도 면에서도 감독이 진정 ‘잘 아는 이야기’를 선택했음을 확인시켜준다. 깊이 있는 시선과 통찰력이 꽤 날카롭다. 한 마디로 유하 작품의
절정이다. 하지만, 잡다한 에피소드들이 한 줄기의 이야기를 따라 고조되지 못한 점이 아쉽다. 약간이지만 작위적인 설정과 대사가 거슬리는
부분도 있다.
권상우와 이정진의 캐스팅은 크로스 됐다고 볼 수 있다. 터프한 이미지의 권상우는 범생이 현수 역을, 온순한 이미지의 이정진은 카리스마
넘치는 날라리 우식 역을 맡았다. 두 배우의 연기 변신은 일단 성공한 듯 보인다. 주연 배우들의 연기가 영화 만큼 ‘풋풋한’ 것이 사실이지만,
눈에 띄게 성장한 것은 분명하다. 피도 눈물도 없는 선도부장 종훈 역의 이종혁과 ‘빨간책’ 공급망 햄버거 역의 박효준을 비롯한 조연들의
연기는 감칠맛을 더한다. 오랜만에 스크린에 모습을 비친 중견배우 천호진, 김부선 등이 영화의 중심을 잡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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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춘옥 기자 ok337@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