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계기 남북 이산가족 상봉 2차 행사가 29일부터 금강산에서 시작될 예정인 가운데 28일 강원도 속초에는 남측 가족 440여명이 도착해 60년 가까이 헤어진 북측 가족을 만난다는 설렘으로 바쁜 하루를 보냈다.
북측 상봉단 99명을 각기 만날 남측 가족들은 대부분 4∼5명으로 이뤄졌으며 이날 오후 2시쯤 강원도 속초 한화콘도에 설치된 방북 접수창구에 도착해 방북 절차를 밟고 북측 가족들에게 전달할 선물 꾸러미를 배송했다.
지난 26일부터 시작된 추석 이산가족 상봉 1차 행사의 남측 상봉단이 120여명으로 구성돼 접수 절차가 간단했던 것과 달리 이날 북측 상봉단을 만날 남측 가족들은 440명이 넘어 접수창구는 상대적으로 북적였다.
그러나 북쪽에 두고 온 가족들을 60년 가까이 그리워했던 만큼 1∼2시간의 기다림이야 이들에겐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였다. 2차 행사 최고령 100세인 김유중 할머니
올해 만 100세인 김유중(경기 파주시) 할머니가 58년 만에 만나는 셋째딸 리혜경(75) 씨에게 가장 하고 싶은 말은 "잘 지냈니? 엄마도 건강히 잘 지냈어"다.
김 할머니가 북에 있는 셋째딸 리혜경 씨를 만나기까지는 꼬박 58년이 걸렸다. 16살 꽃다웠던 딸을 반백의 노인이 돼 만나게 됐으니 가슴이 무너진다.
그렇지만 김 할머니는 마음이 설레인다. 죽은 것으로 알고 있던 딸을 보게 됐으니 꿈만 같다고 표현했다. 솔직히 눈으로 보기 전까지 믿기지 않는 다는 것이 김 할머니의 속마음이다. 그래서 김 할머니는 이번 상봉에 이황복(여ㆍ77), 희경(여ㆍ72 ), 경희(여ㆍ62), 도성(남ㆍ58) 씨 등 1남3녀의 자식을 모두 데리고 리혜경 씨를 만난다.
58년간 헤어져야만 했던 이들 모녀의 사연은 애절했다. 1951년 한국전쟁 당시 경기여고 1학년생이던 리혜경 씨는 서울 돈암동 집을 나간 뒤 가족들과 반세기 넘게 생이별을 했다. 2남 6녀 형제 중 가장 똑똑하고 재주 많던 셋째딸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자 김 할머니는 물론 가족들은 충격에 빠졌었다. 백방으로 소식을 알아봤으나 행방을 알 수가 없었다. 다만 풍문으로 당시 전쟁통에 간호요원으로 지원나갔던 비슷한 또래 여학생들이 사라졌다는 것을 들었을 뿐이다. 사정이 이쯤되면서 김 할머니와 가족들은 전쟁통에 죽은 것으로 보고 제사를 지내왔다. 그러다 이번에 추석계기 이산가족 상봉으로 북측에서 김 할머니를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온 가족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막내 동생인 이도성 씨는 "셋째 누나가 사라질 무렵 겨우 태어난 지 3개월 밖에 안 돼 추억은 없지만 어머니로부터 많은 얘기를 들었다"며 "어머니가 소식을 듣고 북으로 가야겠다며 기쁨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셨다"고 말했다.
1909년 3월생인 김 할머니는 2009 추석 계기 이산가족 상봉 행사중 북측 방문단이 만나게 되는 남한에 사는 가족까지 포함해 최고령자다. 탁구를 잘 쳤던 큰오빠
북쪽 큰오빠 박진기(남 75) 씨를 이번 상봉에서 만나는 남측 여동생 박광자(68) 씨는 "예전에 이산가족 신청을 한번 해봤지만 별 연락이 없어 돌아가신 줄 알았다"며 "살아 생전에 오빠를 볼 수 있다는 게 꿈만 같다"고 말했다.
박광자 씨는 또 "어릴 때 오빠가 탁구를 참 잘 쳤는데 오빠 탁구채를 여동생과 가지고 놀다 무릅 꿇고 크게 혼난 기억이 있다"며 "이번에 올라가면 당시 왜 그렇게 심하게 혼냈냐고 따질 것"이라는 말로 오빠에 대한 그리움을 표했다.
한국전쟁 무렵 서울에서 중동 중학교를 다녔던 박진기 씨는 학교에 가겠다고 나선 이후 소식이 끊겨 나머지 가족들은 박진기 씨가 전쟁 중 사망한 것으로 여겼다.
특히 당시 서울시청 공무원으로 일하며 박진기 씨의 보호자 역할을 했던 매형 정순범(86) 씨는 경남에서 올라온 처남을 잘 챙기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60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다.
정순범 씨는 "중학생이었던 처남 박정기 씨와 장기를 두면 항상 내가 졌다"며 "악기도 잘 다루고 참 똑똑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박광자 씨 가족들은 당초 여동생 3명과 막내 남동생, 매형 등 5명이 이번 상봉행사에 참여할 예정이었지만 여동생 박진남(72) 씨가 방북 직전 녹내장 수술을 해 마지막에 방북을 포기했다.
박진남 씨는 "남북 통일이 돼 사람들이 오고가는 세상이 빨리 와 오빠를 봤으면 좋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자매들을 통해 대신 전달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다른 여동생 박청자(66) 씨는 "부모님은 오빠를 그렇게 그리워하다 10여년 전쯤 결국 돌아가셨다"며 "이번에 금강산에서 오빠를 만나고 오면 부모님 영전에 가서 오빠가 살아있다는 것을 꼭 알릴 것"이라고 다짐했다. “발이 땅에 닿지 않는 느낌이었다”
1950년 말 강원도 강릉에서 둘째 형 김범기(75)씨가 의용군에 끌려가던 것을 목격한 김문기(72) 씨는 몇 년 전까지 형 김범기 씨가 전쟁 중에 죽은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나 2000년 이산 가족 상봉 신청을 했고 형 김범기 씨가 북쪽에 살아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2007년에는 형의 생존확인서를 받아들고 상봉자 명단 200명에까지 포함됐지만 아쉽게 최종명단 100명에 들지 못해 형을 만나지 못했다.
그러나 1년 11개월만에 재개된 이산 상봉 행사에서 뜻밖에도 북쪽의 형이 자신을 찾고 있다.
김문기 씨는 "당시 나는 14살, 형은 16살이었다"며 "원래 애들이 클 때 많이 투닥거리는 것처럼 우리도 많이 다퉜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김문기 씨는 "당시 북쪽에서 공부를 시켜주겠다고 의용군을 모집했다"며 "우리 마을에서도 약 10여명이 형과 함께 의용군으로 끌려갔다"고 말했다.
당시 9살이었던 여동생 김길자(67) 씨는 "큰 오빠가 우리를 찾는다는 소식을 듣고 발이 땅에 닿지 않는 느낌이었다"고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조카들과 함께 이번에 방북하는 김문기 씨 남매는 북쪽에 있는 김범기 씨에게 전달할 가계도를 꺼내 들고 몇 번이나 천천히 읽어 내렸다.
이들 남매가 직접 작성한 가계도에는 부모님과 나머지 형제 3명의 사망날짜, 그리고 형제들의 자식 이름 등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여동생 김길자 씨는 "부모님들은 오빠 사진을 꺼내놓고 만날 울면서 한평생을 보내다 돌아가셨다"며 결국 눈물을 왈칵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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