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연인’에서 김정은(극중 강태영)은 이렇게 말한다. “여자들은 가끔 그런 상상을 하거든요. 화려한 사람들 틈에 나 혼자만 시든 꽃처럼 앉아 있는데, 어디선가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나 내 이름을 불러주고 흐트러진 머리칼 가만가만 쓸어 넘겨주는 상상….”
드라마의 정체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이 대사는 최근의 ‘문화적 감수성’에 대한 명쾌한 해석이기도 하다. 현재 브라운관과 스크린을 지배하는 트렌드는 신데렐라 판타지. ‘말죽거리 잔혹사’ ‘실미도’ ‘태극기를 휘날리며’ 등 마초영화의 폭풍이 한차례 휘몰아친 자리에 할리퀸문고를 연상시키는 멜로드라마가 우후죽순 돋아나고 있다.
방송 3사 신드롬, 스크린에도 몰아쳐
요즘 방송 3사는 죄다 ‘백마탄 왕자’와 ‘캔디’가 점령하고 있다. 부와 명예를 지녔지만 고독한 재벌남과 가난하지만 쾌활한 여자의 러브스토리 SBS ‘파리의 연인’은 제작진들 스스로 ‘신데렐라 드라마의 결정판’이라고 말할 정도로 전형적이다. MBC ‘황태자의 첫사랑’도 거대 리조트 회사의 회장 아들과 그 리조트에서 근무하는 GO의 티격태격 로맨스이며, 100만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 만화를 원작으로 만든 KBS ‘풀하우스’ 또한 화려한 빅스타와 보통 여자의 사랑을 담았다. 모두 비슷비슷한 관습적 설정에도 불구하고 성적은 좋은 편이다. 특히 ‘파리의 연인’은 ‘애기야’ ‘이 안에 네가 있다’ 등 각종 유행어를 낳으며 40~50%의 이례적인 시청률을 기록해 국민드라마로 떠올랐다. 얼마 전 인기리에 종영한 ‘발리에서 생긴 일’ ‘불새’ 또한 여성적 잠재 심리를 자극하는 내용으로 낭만적 판타지가 시대의 주요 문화 키워드임을 확인시켰다.
스크린에도 왕자가 떴다. ‘그놈은 멋있었다’ ‘늑대의 유혹’은 여고생판 신데렐라 판타지. 얼굴도 성적도 ‘그저 그런’ 여고생이 완벽한 킹카 남학생에게 ‘찜’ 당한다는 설정은 10대들이 가슴에 품을만한 이상적 연애담이다.
‘접속’ ‘8월의 크리스마스’ 이후 멜로가 일상적 스타일로 발전하고, ‘결혼하고 싶은 여자’ 등 진보적 여성 드라마가 주목받은 시점에서 동화적 영상물 열풍은 퇴행적인 느낌. 하지만 신데렐라 모티브가 미니스커트처럼 시대를 초월하는 고전적 테마임을 생각하면 ‘주기가 왔다’고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이번엔 어느 때보다 폭발적이다.
현실 잊게 해주는 환각제
그렇다면 대중은 왜 낭만적 로맨스에 열광하는 것일까? 마초영화가 여성 정계 진출 등 여성파워가 뚜렷하게 부각된 시점에 가부장제의 향수를 담아냈다면 여성 취향의 멜로는 삭막하고 암울한 ‘남성세계’에 대한 도피심리가 내재돼 있다. 이라크 전쟁, 김선일 피살, 연쇄살인, 정치 혼란, 치열한 생존경쟁 등의 사회현실은 정글의 법칙과 폭력이 난무하는 남성적 세계다.
실제로 사회 현실이 어두울 때 여성 취향의 말랑말랑한 멜로드라마가 활기를 띄는 경향이 있다. 권은선 영화평론가는 “서구의 많은 연구들은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이데올로기적으로 위기가 팽배할 때 멜로드라마가 대중적 인기를 끌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 멜로드라마가 전성기를 구가했고, 한국에서도 1960년대말에서 1970년대 초반까지 베트남전쟁으로 인한 긴장감 고조와 정부 주도의 급속한 근대화 등 불안한 사회 환경을 배경으로 ‘미워도 다시 한번’ ‘별들의 고향’ 등 멜로가 붐을 이루었다. 1990년대 후반 충무로는 ‘편지’ ‘접속’ ‘8월의 크리스마스’ ‘약속’ 등을 쏟아내며 멜로 절정기를 또 한번 맞이하는데 이 때가 바로 IMF 시대다.
삭막한 현실을 적셔왔던 전통 멜로가 ‘울게 해주는’ 최루제였다면 요즘 멜로는 ‘잊게 해주는’ 환각제다. 그래서 ‘말도 안돼’ ‘있을 수 없는 이야기’ 등의 불만을 늘어놓느니 채널을 돌리거나 극장을 찾지 않는 편이 현명하다. 남녀주인공이 사랑을 키우는 장소가 비일상적인 공간인 점도 판타지를 극대화하기 위한 의도적 장치다. ‘파리의 연인’은 몽마르트르 언덕, 니스 해변 등 파리의 아름다운 풍광을 배경으로 로맨스가 시작되며 ‘황태자의 첫사랑’ 일본 삿포로와 홋카이도 일대, 인도네시아 발리, 남태평양의 타히티 등 세계의 유명 휴양지에서 펼쳐진다. ‘풀하우스’의 연인도 중국에서 만나 태국 푸켓에서 허니문을 맞는다. 과거로의 회귀를 욕망하는 ‘마초물’은 추억의 ‘그 골목’ ‘그 다방’이 판타지의 장소지만,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세계를 갈망하는 여성 판타지는 비일상적 공간이야말로 가장 생생한 ‘꿈의 장소’인 것이다.
현대인의 잠재 욕구 충족
판타지에 열광하는 시대는 역설적으로 냉혹한 현실논리에 욕망이 좌절되는 욕구불만의 시대다. 400만 신용불량자, 실업자 대란, 조기퇴직 등 희망을 찾기 어려운 현실에서 대중은 공감보다 탈출에서 위안을 얻는다. 일상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생활극이 자취를 감추고 비현실적인 멜로드라마가 대중문화를 지배한 현상은 이 같은 사회적 현실과 관련이 깊다. 판타지가 왕성하게 소비되는 것은 집단적 도피심리가 강렬하다는 증거다.
‘파리의 연인’ 김은숙 작가는 “드라마 보는 동안 카드 값 걱정 안하고, 남편이 어디가서 술 먹고 있는지 고민 안 해도 되는 시간을 제공하면 좋겠다”며 집필의도를 밝혔다. 의도는 적중했다. 신데렐라 드라마를 즐겨본다는 주부 성주영(31) 씨는 “꿈같은 이야기지만 그 순간만큼은 골치 아프지 않아 좋다. 사회현실을 다루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시사다큐만으로 충분하다. 드라마를 보면서까지 고민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판타지는 욕망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브라운관과 스크린 속 왕자들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 재력인 점은 이 시대에 물질적 가치가 얼마나 지배적인가를 일깨워준다. 재력과 동시에 감성 또한 빼 놓을 수 없는 왕자의 조건. 돈과 낭만, 두 가지 떡을 손에 쥔 왕자상은 남성과 여성을 모두 관통하는 시대적 이상향이다. 순수한 사랑만으로 결혼이 이루어지기 힘든 현실에서 사랑이 지상 최대의 가치가 되는 드라마의 설정 또한 보상심리를 충족시켜 준다.
여성에게 여성 판타지의 근본적 매혹은 잠재된 여성적 감성(이것이 원초적인 본능이든 사회적 학습 결과이든 간에)을 일깨워주기 때문이다. ‘파리의 연인’ 애청자인 전영자 씨는 “고등학생처럼 연예인과 드라마에 연연하는 자신이 우습지만, 드라마에 빠져드는 과정에서 오랜만에 내 자신이 아줌마가 아닌 여자임을 깨닫게 된다”고 말했다. ‘사랑받고 싶다’는 여성적 욕구는 현실에서 번번이 좌절되거나 억압받아왔다. 세상은 여성으로 하여금 남성적 사회와 싸워 이길 것을 선도하고 있지만, 그러기 위해서 여성성은 부정적으로 폄하되거나 버려야할 대상이었다. 여성성에 대한 부정과 긍정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해온 여성들의 가치분열이 신데렐라 드라마를 낳고 있다는 해석이다.
정춘옥 기자 ok337@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