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에 찰랑이는 단발머리, 짤록한 개량 한복 아래로 보이는 실크 스타킹에 감싸인 종아리와 굽 높은 하이힐. 당당히 고개를 들고 도시를 누빈 신여성’. 20세기 전반 조선 사회에 당혹감과 충격을 안겨주었던 신여성은 어떻게 태어나서 어떤 과정을 겪으며, 어떻게 좌절했는가. 이 책은 20세기 전반 식민지 조선 사회에 나타난 신여성과 이를 둘러싼 담론 및 사회현상을 근대성에 입각해 분석함으로써 조선이 독자적인 근대를 어떻게 형상해나갔는지, 그리고 오늘날 양성 갈등의 원형적 문제가 무엇인지 열쇠를 제공한다.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사이에서 분열
김경일 지음/ 푸른역사 펴냄/ 16,500원 |
식민지 시기의 근대성은 전통과 근대, 한국적인 것과 서구적인 것, 또는 자아정체성과 타자의식의 밀접한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됐다. 이 같은 근대성의 형성 과정에서 신여성만큼 문제의식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존재도 없다.
신여성의 사회적 의미가 지속적 변모의 과정을 겪은 것도 근대의 개념 변천과 연관이 깊다. 1880년부터 1910년까지 개화주의자들에 의해 최초로 여성의 권리와 평등에 대한 관심이 생겨났고, 1920년대를 거치면서 1930년대 중반까지 신여성에 대한 동경과 호응이 뜨거웠으나, 전시체제로 접어들면서 여성은 전쟁 동원과 통제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자아의 해방을 추구했던 신여성 대부분은 사회에서 배재되는 호된 대가를 치러야 했다. 성과 사랑의 자유를 부르짖고, 소비와 유행의 선두에서서 직업전선에 뛰어들었던 신여성은 쓰라린 현실과 맞닥뜨리게 된다.
식민성과 근대성이 복합된 근대 교육을 통해 자기의식을 획득한 신여성은 제국주의적 지배와 민족주의적 저항이라는 모순된 상황에 직면하면서 심각한 자아분열에 빠진다. 이것은 조선의 신여성이 식민지라는 독특한 역사적 토양에서 배양됐기 때문이다. 저자는 ‘신여성들은 동화주의라는 식민 교육 정책의 가장 큰 피해자였다’고 지적한다.
또한, 저자는 ‘신여성의 출현과 그 사회적 파장은 20세기 전반 동아시아 민족 국가들에서 전반적으로 보이는 현상’임을 설명하며 동아시아적 시각을 견지하는 광범위하고 균형적인 역사적 통찰력을 보인다. 여성사적 관점을 택한 대다수의 기존 연구서들이 특정한 여성 개인에게 초점을 맞추거나 개설서 수준에 머무른 것에 비해 식민지 시기의 신여성을 매개로 여성적 시각에서 여성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서술한 점은 이 책의 돋보이는 미덕이다.
저자 김경일 씨는 서문에서 ‘놀라운 점은, 1920년대 신여성들이 제기한 문제들이 오늘날도 반복되고 있다는 것. 양성간에 억압이나 배제와 같은 폭력 대신, 부정과 적대 혹은 무관심 등이 여전하기 때문이다’며, ‘20세기 전반기의 신여성을 기억하는 이 작업은 21세기 전반기의 페미니즘을 창조할 수 있는 비전과 용기를 제공할 것이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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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춘옥 기자 ok337@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