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뜩이나 드라마 천국인 한국에서 최근 방송 3사의 드라마 전쟁은 보다 치열해졌다. 웬만한 영화 10여편을 거뜬히 만들 만한 대작이 나오는가 하면 스크린 스타들도 거액에 영입되고 있다. 경쟁이 치열하다보니 자극은 높아만 간다. 무병 앓는 주인공을 퇴마하는 엽기적 장면이 10분가량 지속되고, 새엄마가 재산을 가로채 도망가는 음모극에 출생의 비밀이 넘쳐난다. 복잡한 연예관계나 맞바람 또한 반복되는 시청률 올리기용 소재다. 이중에서도 최근 드라마의 대표적인 승부 키워드는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가정해체 바람
요즘 드라마 속 가족은 ‘콩가루’ 천지다. MBC 수목드라마 ‘아일랜드’의 등장인물은 하나같이 독특한 가정사를 가지고 있다. 여주인공은 입양아 출신으로 입양부모가 모두 살해당하고 한 남자에게 사랑을 느끼는데 그 남자는 바로 친오빠다. 나이 많은 의부와 불화를 겪던 친오빠는 여자친구의 가정에 얹혀산다. 그 여자친구 집도 가관이다. 부모와 형제들 모두 백수로 여자친구가 에로배우라는 직업으로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진다.
한 여자를 놓고 벌어지는 형제들 간의 갈등도 드라마의 단골 소재다. 종영한 드라마 SBS ‘파리의 연인’과 MBC ‘황태자의 첫사랑’은 모두 출생의 비밀을 둘러싸고 형제들의 애정 갈등을 다뤘다. SBS 수목드라마 ‘형수님은 열아홉’은 계약결혼 후 시동생과 사랑의 감정을 느끼는 이야기. 이 같은 갈등에는 출생의 비밀이 공식으로 놓이는데 최근엔 특히 입양모티브가 유행처럼 번져있다. ‘아일랜드’에서 입양은 남녀관계의 주요한 설정이며 ‘형수님은 열아홉’도 여주인공의 입양 사실이 사랑의 변수로 자리하고 있다. ‘왕꽃 선녀님’은 입양한 딸이 두 명이나 등장해 인물들 간의 복합적인 구조를 만들어낸다. 출생의 비밀과 입양은 극중 남녀주인공들을 뒤엉키고 갈등하게 만드는 극적이면서도 편리한 수단이다.
KBS2 주말연속극 ‘애정의 조건’은 불륜이라는 상투적 드라마 아이템을 사용해 현대사회 가정의 위기를 보여준다. 남편의 외도로 절망에 빠진 아내가 외도 아닌 외도에 빠지게 되고 이로 인해 무너지는 가정, 여자의 과거로 위기를 맞는 부부 등이 시종일관 드라마의 긴장감을 유지시킨다. KBS2의 수목드라마 ‘두번째 프러포즈’는 불륜의 코믹버전이다. 지난해 MBC 미니시리즈 ‘앞집 여자’로 주부 시청자들을 사로잡은 박은령 작가가 비슷한 테마에 다시 한번 도전한 것. MBC 일일연속극 ‘빙점’의 경우 불륜과 유괴, 입양 등의 소재가 총동원돼 가정파탄의 극단을 보여준다. 병원장의 아내가 가벼운 외도로 아이를 유괴당해 잃게 되자 남편은 아내에게 복수하기 위해 유괴범의 딸을 입양하고 딸은 훗날 이 사실을 알고 자살한다는 극단적 내용이다.
이에 대해 이용포 문화평론가는 “출생의 비밀, 불륜, 삼각관계 등의 소재는 드라마의 상투적 설정이다. 이야기를 풀어나가기도 쉽고 관객이 호기심을 얄팍하게 자극해 시청률을 올리기에도 용이하다. 드라마 처음에는 이 같은 소재를 자제하다가도 시청률이 떨어지면 더 열을 내서 자극적 설정을 동원한다”고 설명했다.
개인위주의 사회로 급변하고 공동체가 무너지면서 전통적 의미의 가정이 빠르게 붕괴되고 있는 현실을 드라마가 반영한다는 해석도 있다. 현대사회에서 화목한 가정의 모습은 판타지라는 것. 가족해체 드라마가 쏟아지고 있는 현상은 가족관의 재정립이 시급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문제는 드라마들이 이 같은 사회현실을 흥미위주로 접근하다보니 표피적인 관점에 머무른다는 것이다. 사실 관습적 설정 자체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관습적 장치를 관습적으로 이용하는 것이 문제다. ‘아일랜드’의 경우 출생의 비밀과 사각관계라는 상투적 소재를 사용했지만 오히려 관습을 철저히 무너뜨린다.
브라운관의 블록버스터
대작경쟁 또한 최근 드라마의 주요 트렌드다. KBS 주말 사극 ‘불멸의 이순신’은 360억이라는 국내 최고 제작비를 들인 초대형 블록버스터. 해상 전투 장면 등 드라마로서는 전례가 없는 스케일에 출연인원이 2만명이 훌쩍 넘는 초대형 드라마다. 11월에 방영될 KBS2의 ‘해신’ 또한 총 제작비가 150억원에 달하는 대작이다. 통일신라시대 때 한 중 일을 아우르며 동북아시아의 해상권을 제패했던 장보고의 일대기를 그린 ‘해신’은 ‘불멸의 이순신’을 잇는 해상 드라마로 KBS 사극재패의 야심이 들어있는 기획이다.
MBC가 ‘영웅시대’ 후속작으로 방영될 예정인 월화 드라마 ‘신돈’은 촬영 세트 건설에만 부지 9,000평과 120억원을 투입한 대작. ‘신돈’의 후속작인 ‘삼한지’는 더 엄청나다. 2006년 초 방영을 목표로 준비하고 있는 100부작 드라마 ‘삼한지’는 촬영세트에 2만평의 부지와 200억원 이상의 제작비를 투입하는 등 MBC 사상 최대의 제작 규모가 될 전망이다. SBS도 11월 안방을 찾아갈 대작을 준비하고 있다. 사극과 시대극의 접점에 있는 대하 드라마 ‘토지’가 그것. ‘토지’는 세트 제작비를 제외하고도 100억원대의 예산을 책정했다.
외주제작사가 자체 예산으로 드라마를 사전제작하고 방송사와 계약을 맺는 시스템으로 방영되는 대형 드라마도 늘어날 예정이다. 김종학 프로덕션이 제작한 20부작 미니시리즈 ‘슬픈연가’는 김희선 권상우 송승헌 등 빅스타들이 캐스팅 됐으며, 제작비는 미니시리즈로는 이례적으로 70여억원이라는 거액을 들였다. 이 드라마는 MBC를 통해 1월 방영될 예정이다. JS픽쳐스와 로고스 필름은 50억원이 투입된 16부작 미니시리즈 ‘러브스토리 인 하버드’를 준비하고 있다. 외주제작사 에이트픽스는 중국 유린시네마와 합작으로 드라마 `비천무`를 제작 중이다. 9월30일 중국 촬영을 끝내고 후반작업에 들어가는 이 드라마 또한 순수╂舫晝?80억원 이상이 들어간 블록버스터다.
이 같이 드라마의 덩치가 점차 더 커지고 대작 바람이 부는 것은 드라마의 영향력이 엄청나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가장 손쉽게 시청률을 끌어들일 수 있으며 파급효과도 가장 큰 장르다. 대작드라마 한 편은 방송사 전체 브랜드 이미지와 광고수입에 결정타가 된다. MBC ‘대장금’의 경우 광고수익에 이미지 상승효과는 물론, 드라마 자체 수출에다 음반 게임 캐릭터 도서 모바일 사업 등 각종 부대사업으로 얻는 수익도 상당했다.
하지만 드라마의 대형화에 대한 우려의 시선도 많다. 과잉투자는 그만큼 위험부담이 높다. 대작이 실패하면 그 타격은 방송사 전체를 흔들 만큼 크다. 이 같은 상황은 자연히 질적 저하로 연결될 가능성이 높다. 투자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PPL이 노골화되고 센세이셔널리즘에 빠질 위험도 커진다. 방송사의 사활을 건 대작은 자체 홍보에 열을 올리기 마련이라 각종 오락프로그램을 도배하는 악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장르의 획일화라는 문제도 있다. 제작비가 높은 만큼 안정적 흥행을 꾀하는 블록버스터는 관습적일 수밖에 없다. 작은 드라마가 위축되면 드라마의 실험은 더욱 힘들어진다. 시청자들은 사실 드라마에서 압도적인 볼거리보다 빠져들 만큼 재미있는 이야기를 기대한다. 이야기가 없는 안방의 블록버스터들이 실패하는 사례들이 이를 잘 말해준다. ‘성공시대’ ‘장길산’ ‘구미호외전’ 등이 투자대비 실패했다. 결국 드라마의 몸집은 자연히 균형을 잡아갈 것이다.
안방극장은 영웅시대
영웅 없는 시대 드라마에는 영웅이 넘쳐나고 있다. ‘장길산’은 수구세력에 저항한 민중 영웅의 개혁의 활약상을 담았고, ‘영웅시대’는 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과 이병철 삼성회장을 모델로 했다. 기업드라마를 표방했던 ‘영웅시대’는 사실상 영웅이 등장할 필요도 해서도 안 되는 드라마였지만 우려했던 대로 실존 인물에 픽션을 지나치게 가미하면서 영웅드라마가 됐다. ‘불멸의 이순신’은 설명이 필요 없는 민족 영웅 이순신의 일대기를 조명했다. 제작진은 “구습을 과감히 타파하여 철저한 준비와 개혁의지로 부하들을 이끌던 이순신이야말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진정한 지도자 상이다”며, “세 번의 파직과 두 번의 백의종군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의지로 마침내 7년 전쟁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은 꿈을 꾸는 사람들의 영웅이다”고 기획의도를 밝혔다. 이순신이라는 캐릭터를 활용, 영웅 드라마를 만들겠다는 의미다. 제작 중인 드라마 ‘해신’ ‘신돈’ ‘삼한지’ 등도 영웅신화가 될 전망이다.
특히 역사 속 실존인물의 영웅담은 올해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아우르는 문화 트렌드. 실화 자체가 가지고 있는 메리트에 성공담의 카타르시스가 결합하면서 흥행성이 보장받는 아이템이기 때문에 폭발적 인기를 누리고 있다. 영웅담 성공담은 대중성을 원초적으로 확보하고 있는 이야기 구조다. 특히, 사회상이 불안할수록 영웅 판타지는 더 활개를 친다.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는 것이다. 홍경호 문학박사는 “세상이 뒤틀리고 살기가 어려울수록 허무맹랑한 성공 이야기나 영웅담을 요구하게 된다. 현실적 대안이 없거나 가능성이 희박하다보니 환상적 드라마로 도피하고 대리만족을 얻는 것이다. 로또를 사는 심리와 같다” 말한 바 있다.
살림살이는 쪼들리고, 정치권의 말도 안 되는 싸움에 넌덜머리가 나고, 밤의 도시는 각종 범죄가 넘쳐나고, 일터는 치열한 생존경쟁으로 숨 막히고, 힘의 논리가 세계를 제압하는 이 억압적이고 막막한 세상에서 서민들은 한 편의 영웅 드라마에서 희망을 찾고 있는 것이다.
정춘옥 기자 ok337@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