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을 자른 건
사심(私心)이 아닙니다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는
정거장입니다
밤 열두 시에 지하철을 찾아가는
맨발입니다
조금의 햇살이 필요합니다
뒤틀린 뿌리가 새싹을 내야합니다
질곡의 혈육 뒤엉켜
살아내려고
희망에 기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찰나의 봄에 태어나
남은 계절 동안
자기 수분을 빼앗깁니다
튼 살로 나이테를 새기느라
손발톱이 사라집니다
햇볕 한 줄기에 나르시스 호수처럼
부푸는 꽃망울도 있습니다
아지랑이처럼
꿈꾸기도 합니다
시퍼렇게 동상 입은 가난들
검버섯 아래 뽀얀 영혼이 있을까요
숨길을 죽여
연분홍 꽃가루를 위해
겨울을 자른 게 아닙니다
딱 하루만
이름 없는 봄으로
아무 색깔의 꽃이라도 되려면
조금의 햇빛 길을
만들어야 합니다
저자: 김현희
시인, 껍질의 시(2020) / 고수(高手) (2021) / 견유주의(2021) / 소식주의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