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자신의 후광이자 업보인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덫에 또 다시 시련을 맞이하고 있다. 한일협정문서공개가 굴욕적인 외교의 시비로 비화되고 있으며 서울 광화문과 수원 운한각 현판의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한글 친필 교체, 영화 ‘그때 그사람들’에서의 명예훼손 논란 등 박정희 전 대통령 관련 이야기꺼리가 연일 보도되자 박근혜대표측은 그 배경에 촉각을 곤두 세우고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친정체제 강화 등의 여파로 당내 비주류들까지 ‘반(反) 박근혜’ 목소리를 높이고 있어 박 대표를 더욱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는 등 당내입지까지 영향을 받고 있다.
법적 절차대로 공개
정부가 지난달 17일 공개한 1965년 한일협정 문서는 지난 1952년 2월15일부터 65년 6월22일까지 14년 동안 7차례 회담을 통해 결론을 맺었으나 일제 징병 징용 피해자 보상, 독도, 재일동포 법적지위 등에 대한 명확한 해결점을 찾지 못한 ‘굴욕회담’ ‘구걸외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20일 배포된 육영수여사의 문세광 저격사건 문서는 박 정권이 이 사건을 이용해 김대중 납치 사건을 희석시키려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정부는 공개된 두 문서에 대해 각각 별도의 심의 절차를 거치는 등 적법하다는 입장이다. 2004년 2월13일 법원이 한일협정 관련 5개 문서 공개 판결을 내린 뒤 정부는 같은해 9월 비공개 문서에 대한 대책반을 만들어 검토, 지난해 12월28일 공개를 결정했다는 것이다. 또 문세광저격사건 문서는 ‘외교문서 공개에 관한 규칙’에 따라 작성 30년이 지난 문서를 공개한 것 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외교부 관계자는 “심의 과정에서 정치적인 고려가 개입될 여지가 없다”며“내년에 공개될 문서도 같은 심의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와함께 문화재청은 광화문의 현판을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한글 친필에서 정조의 한문 글씨로 바꾸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으며 수원시 화령전 운한각의 박 전 대통령의 친필 현판은 지난달 24일 서예가 정도준씨의 글씨로 교체한 것을 놓고 박 정권을 비하시키려는 정치적 의도에 따른 것이 아니냐는 비판까지 제기되고 있는 실정이다. 일각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에게 개혁군주 정조의 이미지를 덧씌우려는 시도가 아니냐는 해석까지도 내놓고 있다. 여기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된 10·26사태를 다룬 영화 ‘그때 그 사람들’(감독 임상수 제작 MK픽쳐스)이 박 전 대통령의 여성편력과 함께 엔카(일본 가요)를 들으며 감회에 젖는 모습 등을 노골적으로 묘사해 박근혜 대표측을 당혹케 하고 있다. 영화는 시작과 함께 자막을 통해 ‘이야기에 대한 세부묘사와 인물의 심리묘사는 실제와 다르다’고 밝히고 있으나 ‘고인에 대한 명예훼손’으로 비화될 수도 있으며 이를 감안한 박 전 대통령의 외아들 지만씨는 지난달 11일 ‘선친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상영금지가처분신청을 법원에 제출해 놓고 있는 상태다.
정치적 계산에 의한 의도적(?)
박근혜 대표측과 한나라당은 지난해 정수장학회에 이어 한일협정문서공개 등 무슨 시리즈처럼 박 대표에게 부정적 내용이 터져 나오고 있는데 대해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다. 특히 정수장학회와 한일협정문서공개 시점을 놓고 정치권에서는 역대 정권이 그래왔듯 정치적 계산에 의한 의도적인 선택이 아닌가라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박 전 대통령이 조사 대상에 포함되는 친일진상규명법의 국회통과를 주도했으며 박 정권 당시의 인권탄압 사례 등을 조사하는 과거사기본법도 추진하고 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오해를 사고 있다.
열린우리당이 지난해 7월27일 “박 대표가 이사장인 정수장학회는 김지태씨의 재산을 빼앗아 만든 것”이라며 정수장학회 관련 의혹을 제기했다. 이는 당시 박 대표가 의문사진상규명위의 간첩 빨치산 출신 민주화 기여 인정, 국가보안법 폐지 움직임 등을 겨냥한 발언을 하는 등 국가정체성 문제를 놓고 전면전 발언을 한데 비롯됐다. 이후 박 대표는 한동안 여야 공방의 중심에 서 있어야 했으며 ‘유신 독재의 유산’이라는 비난까지 감수하기도 했다. 한일협정문서·문세광사건 공개 역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산’이라는 점을 내세운 박 대표의 대권도전에 미칠 악영향 등을 계산한 의도적인 행동이라는 의견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한나라당 관계자는 “역사의 진실을 밝힌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한일협정문서 공개 등을 정치적으로 악용돼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홍준표 의원은 “특정 정치세력이 어떤 의도를 갖고 국정을 이끌어가는 빌미가 돼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박 대표 정면돌파위해 ‘민생행보’
한나라당의 이같은 의혹에도 불구하고 정치권 일부에서는 ‘박정희 평가는 이미 여론에 반영’돼 여당이 박근혜 대표를 겨냥한 ‘아버지의 덫’이 오히려 역효과를 낼수도 있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한 정치평론가는 “여권이 아버지 문제를 건드려 박 대표를 압박하면 할수록 친 박근혜, 반 여권 세력을 응집시키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고 분석해 놓고 있다.
그러나 박근혜 대표는 이같은 분위기과는 관계없이 “박근혜가 누구의 딸이라는 것을 잊어 달라” “나를 염두에 두지 말라. 나를 잊어버려라. 어떤 부담도 갖지 말라”고 한 것 등은 과거사 문제에 정면돌파하겠다는 뜻으로 풀이되고 있다. 동시에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 관련된 일이 나올 때마다 자신과 연결해 발목을 잡으려는 시도를 좌시하지 않겠다는 뜻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박 대표는 이같은 자신의 의지를 나타내기라도 하듯 연초부터 계속해온 ‘민생행보’를 전국적으로 확산해 가고 있다. 박 대표는 지난달 25일 신용불량자 실태파악과 단기 채무연체자 구제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수원 신용회복위원회 경기지부를 방문했으며 지난달 말부터는 충북지역 건설현장과 광주·목포지역 민생탐방도 진행중에 있다.
차기대권 불확실 위기감 확산
박근혜 대표가 과거사 문제 정면돌파를 위한 ‘민생행보’ 확산으로 부친인 박 전 대통령과 연관된 논란에서 벗어나 ‘홀로서기’를 하고 있으나 이를 바라보는 한나라당내 사정은 박 대표에게 그리 녹녹치 않은 실정이다. 당내부에서는 박 대표의 정체성과 한나라당의 정체성을 둘러싼 여러계파들이 동시에 ‘반(反) 박근혜’ 목소리를 높이고 있으며 여기에는 박 대표의 정체성으로는 차기대권도 성공하기 어렵다는 위기감이 확산되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실예로 지난해 7월 당 대표로 재선출될 당시 50%를 웃돌던 선호도는 지난해 말 4대 법안처리 과정을 거치면서 20%대로 추락한 점도 한 몫을 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홍준표 의원은 지난달 23일 언론사에 보낸 ‘다시 한나라당을 생각한다’는 이메일에서 “과거사 문건이 공개될 때마다 박 대표와 한나라당은 과거와의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됐다”며“이회창 총재에 이어 끔찍스런 악몽과 함정이 한나라당과 박 대표를 기다리고 있다”고 주장했다. 홍 의원은 또 “한나라당과 박 대표는 일체일 수 없다”며“과거사 문제도 박 대표가 앞장서서 한나라당과 무관하게 자신의 문제로 국한해 당당하게 맞서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여기에다 한나라당 당명개정시기가 연기된 배경에도 각 세력들이 이에 반대하고 있기 때문으로 분석되고 있다. 이재오 의원은 “당 선진화라는 구호 밑에 과거를 은폐하고 그럴듯한 정책 몇 개를 나열하는 것이 선진화가 아니다”며“부끄러운 과거를 덮어 버리려는 꼼수로 당 이름을 바꾼다고 국민들이 새로운 당으로 믿겠느냐”고 과거사에 대해 미온적인 당 지도부를 비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