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전 대통령의 공과논쟁 속에 개봉돼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영화 ‘그때 그 사람들’이 초반 흥행에 선전하고 있다. 10·26사건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제작 전부터 이미 논란의 소지를 안고 출발한 작품이다. 영화계 관계자들은 제작사 MK픽쳐스 심재명 대표가 당연히 애초부터 이 같은 ‘정치적 격돌’을 계산에 넣지 않았겠냐고 말한다. 정치적 논란의 소지가 있는 소재는 피해가던 것이 상책이던 과거와 달리, 요즘은 논란만큼 확실한 흥행 요소도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 술자리에서는 ‘심재명이 박지만 한테 돈 줬다’ ‘박지만에게 영화 흥행에 따른 인센티브를 지급해야 하는거 아니냐’는 농담들이 심심치 않게 오고 갔다. ‘그때 그 사람들’을 둘러싼 이 같은 현상들은 사회적 이슈를 제공하는 것이 영화 마케팅의 한 방법으로 일반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사례다.
‘그때 그 사람들’ 논쟁, 10명 중 6명 “흥행에 도움된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떤 방식으로나 영화가 구설수에 오르면 흥행에는 호재로 작용한다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다. 영화 포털사이트 운영회사인 디지털랩이 지난 3~5일 전국 네티즌 59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는 이 같은 세간의 인식을 객관적 지표로 드러냈다. 고 박정희 대통령의 아들 박지만 씨가 명예훼손을 이유로 상영금지 가처분 신청을 내고, 법원이 다큐멘터리 세 장면을 삭제
한 후 상영이 가능하다는 조건부 상영 판결을 내린 ‘그때 그 사람들’에 대한 일련의 과정은 ‘흥행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60%에 달했다. 이에 반해 악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의견은 22.1%에 불과했다.
영화의 소재 자체가 아직은 민감한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한 데다, 법적 소송으로 관심을 더욱 모으면서 영화 전문 잡지는 물론, 각종 신문과 방송 심지어 전문 시사 매체들까지 영화 내용을 앞 다투어 다루면서 영화사는 힘들이지 않고 마케팅을 한 셈이 됐다. MK픽처스 관계자는 “언론 보도로 10·26사건을 잘 모르는 20대 초반의 관객층의 호기심을 유발하는데 성공했고, 영화 주 소비층이 아닌 중년 관객들은 사건 자체에 대한 관심 때문에 극장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거짓말’부터 ‘실미도’까지 언론이 흥행 효자
논란 마케팅이 대중문화예술계에서 효력을 입증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오래 전 일이다. 충무로 관객 1000만 시대를 연 ‘실미도’는 흥행 기록만큼이나 시끄러운 영화였다. 역사적 사건과 북파공작원에 대한 재조명에서부터 시작해 영화에 사용된 북한 혁명가 ‘적기가’에 군국주의, 마초주의까지 온통 논란거리로 가득했던 이 영화는 결과적으로 영화에는 도통 관심 없던 관객층까지 죄다 포섭하는데 성공했다.
‘챔피언’ ‘살인의 추억’ ‘효자동 이발사’ ‘바람의 파이터’ ‘역도산’ 등 실화를 다룬 영화들은 대체로 이 같은 면에서 ‘먹고 들어가는’ 점이 많았다. 영화 외적 사건을 기사화하길 좋아하는 언론의 풍토하고 잘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노출은 영화 논란의 고전이다. ‘바람난 가족’은 여배우 문소리의 노출로 주목을 끌었고, 장선우 감독의 ‘거짓말’ 또한 그의 전작 ‘나쁜 영화’와 마찬가지로 대담한 성적 표현으로 개봉 전부터 화제가 됐다. 사도 마조히즘 등 변태적 성행위의 표현은 법정까지 가면서 예술-외설 논쟁으로 화제를 모았고, ‘거짓말’은 그해 흥행순위 8위를 기록하며 제작비 대비 대박을 터뜨렸다. 노인들의 성을 다룬 영화 ‘죽어도 좋아’ 또한 등급위가 두 차례나 ‘제한상영가’ 등급을 내려 논란을 일으켰다. 이 영화는 노인의 성에 대한 사회적 문제제기 등 이슈를 제공했지만 전형적인 오락물은 아니었다. 독립영화인 만큼 큰 흥행은 기록하지 못했지만 상영기간 동안 꾸준한 발걸음이 이어졌는데, 그나마 언론에 오르내리면서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는 평가를 얻었다.
폭력 또한 성적 표현 못지않은 논란 마케팅의 단골이다. 최근 그 수위가 낮아졌지만 엽기적인 영상을 즐겨 만든 김기덕 영화는 항상 잔혹성 시비를 불러 일으켰다. ‘올드보이’ 또한 잔혹한 묘사와 근친상간이라는 소재로 시사회 직후부터 논란을 일으켰고, 이것은 흥행에 어느 정도 긍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비난 기사도 보도자료로 뿌려
최근에는 논란 마케팅이 노골적으로 사용되는 경향이 강하다. 옴니버스 공포물 ‘쓰리 몬스터’는 개봉 전에 한 신문에서 폭력성에 대한 비판적 기사를 올렸는데, 이 기사는 곧 바로 홍보사를 통해 보도자료로 뿌려졌다. 15세 중학생의 임신과 출산이란 소재를 담은 ‘제니, 주노’ 또한 10대의 성에 대한 논란을 마케팅으로 적극 이용했다.
언론의 실질적 자유와 함께 인터넷의 일반화로 사적 논쟁이 풍부해진 것이 논란 마케팅이 광고로 통용된 배경이다. 대중문화시장의 규모가 커진 것도 논란 마케팅의 유행과 관련이 깊다. 경쟁 작품의 수 자체가 많아지자 일단 튀어야 살게 된 것이다.
가수들은 의도적으로 노래 가사에 사회적 메시지를 비판적으로 깔거나 욕설 등의 금지어를 넣어 언론 보도를 유도했고, 드라마도 폭력적 장면이나 정치적 이슈 등을 자극적으로 배치해 그에 따른 논란의 여파로 시청률을 올리곤 했다. 스포츠 신문에 ‘파문’이라는 단어와 함께 대문짝만하게 실린 연예인에 대한 기사들은 스타의 지명도를 올리기 위한 홍보성이 대부분이었다.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이 같은 논란 마케팅을 비아냥거린 ‘파문 시리즈’가 유행하기도 했다. 논란 마케팅이 그만큼 이미 대다수의 대중들이 광고로 받아들일 만큼 진부해진 홍보 방식이됐다는 의미기도 하다. ‘올드보이’가 영국에서 상영될 때, 영국의 한 언론은 주인공이 산낙지를 먹는 장면에 대해 센세이셔널리즘이라는 비판적 비평을 보도했다. 이 기사에 대해 한국의 한 네티즌은 ‘영국도 이런 식으로 홍보하네’라는 댓글을 달았다. 언론과 홍보사의 거래를 대중이 얼마나 철저하게 인지하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대목이다.
영화에 대한 선입견이 찬물 끼얹을 수도
논란 마케팅은 일시적인 주목 끌기에는 상당한 효과를 발휘한다. ‘실미도’나 ‘그때 그 사람들’이 극장출입을 끊은 세대에게까지 화제로 떠오르고 개봉관을 찾아보는 성과를 발휘하는 것을 보면 논란 마케팅의 효과가 얼마나 대단한가를 짐작할 수 있다. “강우석 감독이 누군지, 설경구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텔레비전에 연일 보도되고 보여주니까 그 유명한 사건을 다뤘다니 한번 봐야겠다”는 호기심이 발동했다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하지만, 논란 마케팅 또한 입소문의 뒷심을 발휘할만한 영화가 돼야 효과를 거둘 수 있지 논란 자체만으로 장기 흥행은 어렵다. 더구나 영화의 본질을 벗어난 마케팅이라는 점에서 한계와 위험성도 크다.
이를테면 ‘올드보이’는 근친상간이라는 자극적 요소로 대중에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불순한 영화라는 선입견을 주었고, ‘죽어도 좋아’ 또한 노인의 성과 사랑에 대한 진정성이 담긴 시선에도 불구하고 논란 과정에서 소재주의적 영화라는 편견을 가지게 된 관객이 많았다. 특히 귀여운 로맨틱 코미디인 이 영화는 시사프로그램에 등장하는 만큼, 무겁고 칙칙한 영화일 것이라고 짐작하게 하는 경향도 있었다. ‘그때 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감각적인 블랙코미디를 정치적으로 접근하면서 생기는 오해나 실망이 많을 수 있다. 정치적인 영화를 원하는 관객에게 ‘그때 그 사람들’은 핀트가 빗나간 영화로 보이기 십상이다.
영화 마케팅은 다수에게 영화에 대한 관심을 끌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영화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주는 것도 중요하다. 그 영화를 좋아할만한 관객층에게 제대로 어필하는 것이 가장 성공적인 마케팅이라는 것이다. ‘지구를 지켜라’는 마이너적인 영화적 감수성을 일부러 숨기고 코미디를 강조한 마케팅으로 실패를 봤다. 실험적 스타일을 좋아하는 관객은 이 영화가 대중적 코미디인줄 알고 보지 않았고, 가벼운 코미디인줄 알고 극장을 찾은 관객은 ‘도통 이해 안 되는 이상한 영화’라는 입소문을 내면서 극장가에서 일찌감치 간판을 내려야 했다. 나중에 비디오 시장에서 이 영화의 진가가 입증되면서 대표적인 마케팅 실패 사례가 됐다.
논란 신드롬 또한 이와 비슷한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을 안고 있다. 영화 외적 논쟁에만 몰두해 영화 내적인 평가가 뒷전이 되는 것 또한 심각한 문제다. 영화 ‘실미도’를 부정하는 것은, 북파공작원을 부정하는 것 같은 이상한 분위기에 휩싸였던 것처럼, ‘그때 그 사람들’이 10·26사건 자체가 되어가는 형상이다. 이 같은 영화계의 주객전도 현상이 문화의 파워를 입증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문화적 발전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평단의 우려 또한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영화의 발전은 영화 자체에 대한 다양한 담론을 자양분으로 하지, 영화가 다룬 소재나 부분적인 표현에 대한 사회적 논쟁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춘옥 기자 ok337@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