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봉 전에 영화제에서 먼저 주목받는 영화가 있다. 그런 영화들에 대한 편견은 보통 두 가지로 압축되는데 하나는 작품성이 높을 것, 또 다른 하나는 지루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두 가지 모두 그야말로 편견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뉴커런츠상을 수상하면서 영화제의 이슈로 떠올랐던 이윤기 감독의 ‘여자, 정혜’도 ‘영화제 영화’로 단순 해석되는 ‘실수’를 범하기에는 아까운 작품이다. 베를린영화제에서 넷팩(NETPAC,아시아영화진흥기구)상을 거머쥐는 등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러브콜을 받은 이 영화는 데뷔작에서 보기 드문 성취를 보여줌과 동시에 영화보기의 즐거움 또한 만만치 않게 갖췄다.
보통 사람의 특별한 영혼
우편 취급소 여직원 정혜. 직장에서 멀지 않은 그녀의 작은 집엔 TV 홈쇼핑으로 사들인 물건들, 아파트 화단에서 주워온 어린 고양이가 그녀를 기다린다. 조용한 일요일 오후. 고양이와 발장난하며 베란다 너머로 들려오는 아이들의 재잘거림을 듣는 시간이 정혜는 그 어느 때보다 좋다고 생각한다. 정혜에게 어린시절이란 한 손엔 연필과 다른 한 손엔 담배를 들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엄마의 조용한 모습과 어린 정혜로선 감당하기 힘들었던 기억 뿐. 그리고 자신의 유일한 그늘이었던 엄마의 갑작스런
죽음은 삶이 그녀에게 남긴 상처다. 그런 여자 정혜에게 어느날 그녀의 마음을 흔드는 사랑이 찾아온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상처를 가진 29세 여자에게 찾아온 새로운 사랑과 치유의 과정을 정교하게 그린 ‘여자, 정혜’는 내면의 상처를 따뜻하게 응시하는 감독의 시선이 돋보이는 감성 영화다. 평범한 주인공과 그녀의 일상에 대해 관객의 관심을 환기시키고 영혼의 상처를 연민을 담아 예민하게 포착함으로써 공감과 여운을 불러일으키는 영상의 결에는 인간에 대한 진정성이 느껴진다. 주로 드라마틱하고 강렬한 캐릭터에 집중하는 한국영화의 경향 속에서 일상과 내면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드러내는 이윤기 감독의 연출은 새롭고도 인상적이다.
마음의 흔들림을 포착하는 100% 핸드헬드 촬영
“작은 사랑의 감정, 그 미세한 파동이 한 사람의 인생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조금은 극단적이고 아이러니한 상황으로 표현하려 한다. 또한, 정혜의 마음 속 슬픔과 작은 흔들림들이 우리들 가슴으로 전달됐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 우리가 쉽게 놓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감독은 이 같은 연출 의도를 살리기 위해 특별한 핸드헬드 기법의 촬영을 선택했다. 정혜의 내면을 가장 다이내믹하게 들여다보는 방법으로 가까이에서 그녀를 관찰하기로 했던 것.
캐릭터와 1m의 거리를 유지하며 누군가의 시선으로 그녀를 들여다보는 카메라의 시점은 영혼의 무늬를 세밀하게 잡아낸다. 미동이 있는 듯 없는 듯, 카메라는 인물에 다가가서 상처와 외로움, 사랑을 그리워하는 순간의 흔들림, 그리고 서서히 시작되는 감정의 동요까지 포착해낸다. 심리스릴러 ‘H’와 형사코믹느와르 ‘목포는 항구다’, 그리고 최근 ‘그때 그 사람들’에서 인물들 간의 긴장감과 정서적 교감, 각각의 내면을 사실적으로 구사한 바 있는 최진웅 촬영감독은 긴 호흡의 100% 핸드헬드 촬영을 기본으로 빅클로즈업 등의 과감한 앵글을 사용함으로써 최대한 인물에 밀착해 감정을 부각하는데 집중했다. 기존의 핸드헬드 방식이 긴박성과 현장성을 포착하는데 집중했다면, ‘여자, 정혜’는 인물의 정서 변화와 바라보는 시선의 거리두기에 따라 미세하게 움직이는 감정을 잡아내는데 중점을 둔 것이 특색이다. 흔들림이 최소화된 핸드헬드 촬영은 정혜의 시선처럼 일상을 담아내고, 때로 섬세하고 때로 격정적으로 변화하는 감정의 결을 유연하고도 밀접하게 포착해낸다.
김지수의 발견
이 영화의 또 하나의 성과는 김지수의 발견이다. 10여년 연기인생의 첫 스크린 데뷔로 각박하고 폭력적인 이 시대에 이상하리만치 착하고, 까닭 없이 평화롭고, 바깥세상과의 단절을 자연스럽게 수긍하는 정혜를 선택한 김지수는 캐릭터에 대한 정확한 분석과 감성적 이해를 바탕으로 놀라운 연기를 펼쳐 보인다. 선댄스 영화제의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선댄스 필름 가이드’는 ‘마술 같은 최면의 힘을 지닌 놀라운 배우’라고 김지수를 격찬하기도 했다.
정혜가 일하는 우체국에 들러 자신의 원고를 부치던 작가 지망생으로 정혜에게 봄날의 따뜻한 바람을 일으키는 남자를 맡은 황정민 또한 좋은 연기를 보여준다. ‘바람난 가족’에서의 인상적인 연기 이후, 단숨에 송광호와 설경구의 대를 이을 재목으로 부상한 그는 기존의 선 굵은 캐릭터와는 180도 다른 새로운 매력을 발휘했다. 그는 담백하고 섬세한 감성 연기로 감정 표현엔 서툴지만 소박하고 진심 어린 미소를 가진 남자 캐릭터를 구체화시키며 작품에 풍부함을 더한다.
희망의 울림 코러스
감독 : 크리스토프 바라티에
출연 : 제라르 주노, 프랑수아 베를레앙, 자크 페랭
전쟁으로 희망을 잃은 시골 기숙사 학교의 아이들과 임시직 교사로 부임한 마티유가 음악을 통해 희망을 찾게 되는 휴먼 드라마. 배경은 2차 대전 직후, 프랑스 마르세이유의 작은 기숙사 학교. 부모의 부재와 전쟁의 상처로 거칠어진 아이들에게 학교는 강력한 체벌과 규칙으로 대응한다. 그리고 이곳에 음악을 포기한 작곡가 마티유가 교사로 부임해 오면서 얼음처럼 차가웠던 교정은 변화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교장이 그들의 노래를 금지하면서 그들의 꿈에 먹구름이 드리워진다.
끌리면 떠나라 바이브레이터
감독 : 히로키 류이치
출연 : 테라지마 시노부, 오모리 나오
눈 내리는 밤의 편의점, 술을 사러 온 프리랜서 르포 라이터 하야카와 레이. 그녀는 오늘도 머리 속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언젠가 들은 누군가의 말, 잡지의 문장들, 말할 수 없었던 내면의 느낌들이 수많은 목소리가 되어 그녀를 괴롭히고 있는 것. 목소리들과 함께 와인을 찾던 그녀에게 한 남자의 모습이 들어온다. 그에게 반응하는 그녀와 소리들, ‘먹고 싶다, 저거 먹고 싶다…’ 결국, 레이는 편의점을 나와 남자를 뒤쫓는다. 남자는 장거리 트럭 운전사인 오카베 타카토시. 트럭에 올라탄 레이는 그와 함께 술을 마시고 차의 진동을 느끼며 사랑을 나눈다.
정춘옥 기자 ok337@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