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안 뉴시네마의 거장 따비아니 형제의 1980, 90년 작업을 대표하는 걸작이 소개된다. ‘피오릴레’와 ‘로렌조의 밤’은 역사와 기억의 문제를 사실적으로 다루면서도 주관적인 해석의 장을 여는 따비아니 형제의 영화적 색채가 잘 드러난 작품. 두 작품 모두 판타지와 우화, 신화와 전설을 도입해 상상력이 넘치는 아름다운 시적 공간을 창조하고 있다.
따비아니 형제의 오랜 영화 동지인 작곡가 니콜라 피오바니의 음악이 극적이면서도 서정적인 아우라로 영화의 미학적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는 점도 두 영화의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자전적인 에피소드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영화 세계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놓치지 말야야 할 작품들이다.
이루지 못한 사랑은 다시 돌아온다
‘피오릴레’는 잔인한 운명에 휩쓸린 베네데티 가문의 역사를 세 커플의 비극적인 사랑을 통해 이야기한다. 18세기 말 이탈리아에 프랑스 혁명의 이상을 전파하러 온 프랑스 군인과 이탈리아의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는 쟝과 엘리자베타 커플, 훔친 황금으로 얻은 경제적 부를 바탕으로 토스카나 지방의 명문귀족가문이 된 베네데티 가의 딸 엘리사와 비천한 농사꾼의 아들 엘리오 커플, 2차 세계대전 당시 레지스탕스 활동가로 만나 사랑에 빠지는 마씨모와 치아라 커플. 세 커플은 각각 국경의 벽, 신분차이의 벽, 정치적 현실의 벽을 뛰어넘어 사랑에 빠지지만 황금에 대한 탐욕, 정치권력에 대한 야심, 시대적 아픔으로 인해 그 사랑을 끝내 이루지 못한다.
이 영화는 환상적인 플래시백으로 200년의 세월을 넘나드는 시간여행을 매끄럽게 표현한다. 따비아니 형제는 수백년의 세월에도 불구하고 변함이 없는 토스카나의 자연풍경과 건물들을 효과적으로 이용한다. 예컨대 쟝과 엘리자베타의 시대로 들어가는 첫 번째 플래시백은 달리는 차의 창문 밖으로 아이들이 바라보는 토스카나의 평원에 18세기 프랑스 군인들이 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과거로 연결된다. 결국 하나의 공간을 통해 현재와 과거를 동시에 재현하는 플래시백은 현실과 과거의 밀접한 관계, 즉 과거는 지나간 사건이 아니라 현실을 구성하는 사건으로 엄연히 현존하고 있다는 감독의 주제의식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피오릴레’는 따비아니 형제가 어릴 적 어머니에게 들은 토스카나 지방 전설이 바탕이 됐다. 감독은 영화의 배경을 이탈리아 근대사의 격동의 세 시기로 설정, 전설이 실제 역사 속으로 스며들게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영화는 다양한 해석을 낳는 풍부한 텍스트로 거듭났다. 영화 속 세 커플의 러브스토리를 들여다보면, 차이와 한계를 뛰어넘어 하나가 되는 유토피아에 대한 열망과 이들의 비극적인 운명을 통해 새로운 사회 건설을 위협하는 현실적 문제를 탐색하는 따비아니 형제의 시선을 동시에 느낄 수 있으며, 한 편으로는 재물과 권력의 유착관계로 형성된 자본주의 사회의 기원을 밝히는 현대적 우화로 읽힐 수도 있다.
별이 쏟아지던 어느 밤에 일어난 마술
잔인한 전쟁에 휘말린 삶을 오히려 로맨틱하고 판타스틱하게 재구성한 ‘로렌조의 밤’은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따비아니 형제가 유년시절에 실제로 경험한 사건을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어린시절을 회상하는 나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영화가 다루는 것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참상이지만, 6살 어린 소녀의 눈을 통해 모든 일은 흥미진진하게 그려진다. 한밤중에 마을 사람들과 함께 까만 옷을 입고 하염없이 걸어야했던 피난길은 스릴 넘치는 모험으로 뒤바뀌고, 독일군에 의해 살던 집이 폭파되던 밤이 소녀의 삶에서 가장 신나는 순간으로 재현된다. 특히 평단이 입을 모아 베스트씬으로 꼽는 ‘밀밭 전투’는 소녀의 신화적 상상력이 만개하는 장면. 파시스트와 농부들의 전투를 호머의 일리어드에 나오는 영웅들의 전투로 변형시켜 판타지의 재미와 영웅서사시의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명장면이다.
이 영화의 특히 돋보이는 점은 가슴 아픈 시간의 이야기를 따뜻한 시선으로 감싸 안는데 있다. 비극적인 역사를 다루면서도 각각 인물들의 사연에 주목함으로써 ‘로렌조의 밤’은 거대 역사에 가리워진 개인들의 풍요로운 경험을 복원해 내는데 성공했다. 영화는 따스한 인간미와 소박한 시골풍경의 위대함을 통해 역설적으로 전쟁의 비극에 다가간다.
따비아니식 리얼리즘은 객관과 주관을 넘나들며 역사적 사건을 개인들의 주관적 기억 속으로 용해시킨다. 더 나아가 사건에 신화와 전설, 판타지와 로맨스를 결합시켜 그 당시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원형으로 다가간다. 네오리얼리즘이 삶의 엄숙함과 가혹함을 보여주기 위해 치밀한 현실재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따비아니 형제는 네오리얼리즘의 사실적인 재현의 한계를 벗어남으로써 역설적으로 더욱 생생한 삶을 담아내고 현실감 있는 인물을 그려낸 것이다. ‘로렌조의 밤’은 네오리얼리즘을 넘어선 따비아니식 리얼리즘의 정수가 담긴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