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계는 그동안 ‘산별의 깃발’라는 노래를 따로 만들어 부를 정도로 산별노조 건설에 힘을 모아왔다. 강력한 지도체제를 갖추는 산별노조 체제는 노동계의 힘을 극대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별노조는 수년 전에 출범해 현재 금속노조, 보건의료노조, 금융노조 등이 운영되고 있다.
6월 26일 대우자동차판매 노조를 시작으로 30일까지 기아차, 대우차, 쌍용차 등 완성차 노조와 대우조선 노조, 한국델파이 노조 등 금속산업연맹 소속 대규모 기업별 노조들이 대거 산별전환 동시 투표 및 총회에 들어갔으며, 이 날 산별노조 건설은 ‘가결’되었다.
조합원 4만3천명의 국내 최대이자 가장 강력한 기업별 노조로 꼽히는 현대자동차 노조는 전체 조합원 4만3,758명의 91.33%인 3만9,937명이 참여한 찬반투표를 통해 71.54%의 찬성을 얻어 냈다. 이로써 현대자동차 노조는 소멸하고, 민주노총 산하 금속산별노조 현대자동차 지부가 출범하게 됐다.
현대차 외에도 기아자동차 노조도 이날 조합원 2만5,892명이 투표에 참여(투표율 94.2%), 76.34%의 찬성률(1만9,765명 찬성)로 산별노조 가입을 결정했으며, GM대우자동차는 투표 참여 조합원의 71.54%(8,439명 투표, 6,495명 찬성)가 산별노조 가입에 찬성했다.
이에 따라 민주노총은 산별 노조의 강력한 교섭력을 바탕으로 한층 입지가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대기업 노조는 물론 중소기업 노조들도 산별로 전환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노동계 산별노조라는 보검을 쥐다
노동계가 줄기차게 주장한 산별노조가 만들어지면 무엇이 달라질까? 우선, 산별노조가 만들어지면 동일 산업에 종사하는 모든 노동자들이 하나의 노동조합으로 조직된다. 기업별 노조에 있던 교섭권과 파업권, 재정권 등도 산별노조 중앙에 귀속된다. 당연히 노조가 더욱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다.
또, 산별노조가 출범하게 되면 노동계의 요구가 특정 기업사업장이 아닌 해당산업 전체의 요구 중심으로 옮겨가면서, 중소업체와 비정규직의 요구에 방점을 두게 될 것이다. 따라서 장기적으로 비정규직의 요구는 높게 잡는 반면, 대기업 정규직의 요구는 상대적으로 낮추는 등의 조정도 가능해질 수 있다.
또, 1산업에 1 단위노조로 조직되기 때문에 그 산업에 속하는 전국의 모든 노동자가 조직대상이 되며, 그 산업노조가 체결하는 단체협약의 적용대상이 될 수 있다.
산업별 노조는 특정기업에 속하여 근로하고 있지 않아도 조직될 수 있으므로 무엇보다도 정규직, 비정규직, 심지어 실업상태에 있는 노동자까지도 조합원 자격을 가질 수 있다. 또, 산업별 노조의 단체협약 상대는 그 산업의 사용자단체가 된다. 예를 들어 자동차산업노조의 교섭대상은 자동차산업 사용자들의 협의체가 된다.
이같은 체제가 구성될 경우 노동계 입장에서는 기존 기업별 노조 구조에서 가지는 한계를 극복할 수 있다. 그동안 대기업 노조는 비정규직과 중소기업 노조의 이해를 대변하는데 실패해 ‘귀족노조’라는 비난에 시달려왔으며, 각 기업별 노조는 일관된 요구안을 내놓지 못했었다. 자신을 대변할 수 있을 만큼 노조가 정치 세력화되어 있지 않으며, 정부와 자본의 신자유주의적인 노동시장 유연화에 대처하기에는 기업별 노조가 너무 무력한 상황. 이같은 현실이 산별노조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산별노조 추진의 배경에 대해 한국노동교육원 박태주 교수는 “노사관계 로드맵으로 불리는 복수노조 허용과 전임자 임금지급 금지는 노동운동의 위기와 함께 주체적이고 공세적인 노동계의 대응을 요구했다”면서 “해외생산의 확대와 해외진출의 가속화가 초래한 고용불안은 기업별 체제라는 재래식 무기로 대응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고 설명한다. 박 교수는 “노조의 개입 없이 노동정책에 대한 문제 해결을 기대하기란 어렵다는 선전이 먹혀들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침체기를 걷고 있는 한국노동운동이 산별노조 건설을 시급하게 추진하고 있는 것은 스스로의 활로를 찾으려는 몸부림에 가깝다. 산별노조 전환이 가결된 후, 한 노조간부는 “후덥지근한 골방에 갇혀 있다가 오랜만에 한 줄기 비를 맞은 느낌이다. 노동운동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신호탄이다.”고 기대를 감추지 않는다.
한편, 전경련은 벌써부터 큰 우려를 보인다. 전경련은 “산별전환이 이뤄질 경우 산업현장에 많은 부작용을 초래할 것”이라면서 “산별노조의 장점보다는 무분별한 파업의 가능성이 증대되고 중앙단위와 개별 사업장에서의 이중삼중의 교섭비용 부담초래 등 부작용이 더 많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경련 위원들은 “현재 개별 사업장 내에서 특별한 노사관련 쟁점사항이 부각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비정규직 법안 관련 사안이나 산별노조 전환 관철 등 상급단체가 지시하는 정치적인 이슈에 얽매여 불법파업을 하는 사례가 증대하는 경향이 있다”고 우려를 보이고 있다.
전략적 유연성을 발휘하라
결국,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함께 한국노동조합의 가장 큰 화두로 20여 년 동안 자리 잡아온 산별노조 건설이 금속연맹이라는 초강력노조를 만들어내면서 보격적인 첫발을 떼게 됐다. 금속연맹은 “10월에 대의원대회를 개최해 금속산업노조(산별노조)를 완성할 것”이라고 밝히고 산별노조의 완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러나 산별노조 자체가 노동계에 희망의 보증수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임금 격차는 원만한 산별교섭을 어렵게 할 가능성이 크다. 대기업 노조원들은 손해를 보고, 중소기업은 경영에 부담이 되는 내용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탓이다. 게다가 잦은 정치적 파업을 벌일 경우 노동자들은 오히려 노조에 등을 돌릴 수 있으며, 노동계는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일단 칼자루를 노동계가 쥐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산별노조라는 칼은 ‘보검’임에 틀림이 없지만 노동계가 어떻게 휘두르냐에 따라 그 진가가 달라진다. 스스로를 벨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이에 대해 한국노동교육원 박태주 교수는 “이제 노조에게는 투쟁을 통한 산별 완성과 노사간 타협에 의한 연착륙이라는 두 가지 길이 있다.”면서 “산별의 연착륙을 위해서는 노조의 전략적 유연성이 뒤따라야한다”고 지적한다. ‘투쟁 일변도’나 ‘타협 일변도’가 아닌 상황에 따라 ‘투쟁’과 ‘타협’을 적절하게 혼용하는 융통성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