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4 지방선거’에서 ‘힘 있는 시장’론을 내세운 유정복 후보가 인천시장에 당선됐다.
유정복 시장이 인천의 새 리더가 된 데에는 인천을 위기에서 구해줄 강한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인천 시민들의 공감대가 있었다. 인천 시민들은 유 시장이 인천 개발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여러 가지 현안사항을 풀어줄 적임자인지, 관심과 기대로 지켜보고 있다.
인천이 낳아 인천이 배출한 ‘엘리트 행정가’
유정복 시장은 지난 1957년 6월6일 동구 송림동 182번지에서 4남3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이북에서 피난을 내려온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 어릴 때부터 강하게 성장한 유 시장은 송림초등학교, 선인중학교, 제물포고등학교 등 꿈 많은 학창시절을 인천에서 보냈다. 성적이 남보다 우수했던 그는 외교관의 꿈을 안고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으나 입학 후 공직자의 길로 진로를 수정했다.
대학교 3학년(1979년)때 22세의 나이로 제 23회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육군 중위로 전역했다. 1984년 강원도청에서 공직에 첫발을 들여놓은 그는 내무부 인사계장, 경기도 기획관을 거쳐 1994년 36세의 나이로 김포군수에 임명되며 전국 최연소 군수라는 타이틀을 획득했다. 이어 1995년 인천 서구청장 발령으로 최연소 구청장이라는 보너스까지 얻었다.
그 후 유 시장은 일생일대의 승부수를 던져야하는 일이 터졌다. 민선 1기를 맞아 김포군민들이 연일 몰려와 김포군수 출마를 요구, 선거 20일을 앞두고 아무런 준비도 없는 상태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유권자 64%의 압도적인 지지율로 1995년 7월1일 초대 민선군수로 취임했다. 유 시장은 “인천 서구를 포기하고 열망하는 김포군민들을 쫓아 김포에 출사표를 던진 것은 일생일대를 건 도박이었다”며 “사랑하는 군민들의 뜻을 외면하기 어려웠다”고 당시를 회고 했다.
이후 1998년 4월 김포시 승격과 함께 초대 김포시장에 취임, 전국 최연소 시장이돼 군수 · 구청장 · 시장을 전국 최연소로 역임하는 전무후무한 기록 보유의 공직자라는 닉네임을 달고 다닌다.
박 대통령과 운명의 10년
이러한 행정 경험이 뒷받침돼 17·18·19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정치인으로서 제2의 인생을 맞게 된다. 초선의원이었던 17대 국회의원시절 국정감사 우수의원(2004년)을 비롯해 입법활동과 출석률 등 종합평가에서 의정활동 우수의원으로(2005년)선정되는 등 초선의원 시절부터 활발한 의정 활동을 벌였다.
초선임에도 불구, 유시장의 열정적인 의정활동이 알려지며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대표 비서실장으로 발탁되며 첫 인연을 맺었다.그 후 2007년 대통령후부 비서실장, 2012년 대선후보 직능총괄본부장, 2013 제 18대 박근혜 대통령 취임준비윈원회 부위원장, 2014년 박근혜 정부 초대 안전행정부장관에 오르며 박 대통령과 운명의 10년을 함께 해왔다.
이명박 정부 때 역임했던 농립수산식품부장관시절 유 시장은 취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위기를 맞는 일이 발생했다. 전국적으로 쌀값하락, 배추 값 폭등, 구제역 발생, 조류인플루엔자 발생, 일본 대지진으로 수산물 방사능 파동 등 한 시도 편할 날이 없었다. 구제역 발생 당시에는 장관실에 야전 침대를 갖다놓고 24시간 진두지휘에 나사며 확산방지에 나섰다.
이어 각종 언론과 TV에 직접 출연해 구제역의 실체에 대해 설명하고 대책을 내놓았다. 사태가 수습된 뒤 자신이 겪은 내용을 엮어(구제역백서)를 발간해 재발 방지에도 노력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유 시장은 정치·행정 외에도 문화·예술·체육에도 깊은 관심과 함께 많은 공을 들여온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국민생활체육회장, (사)전통문화예술연구소이사장 등을 역임하며 문화·체육 발전에 앞장서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