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보다 더 만화같은 영화
학원무협 판타지 ‘화산고’
교실에서는 분필이 총알처럼
날아다니고, 운동장에서는 학생과 선생이 공중에 떠 무술을 겨루며, 손가락 하나 대지 않고 유리창을 산산조각 내는 학생들이 모인 학교. ‘화산고’가
드디어 교문을 열었다.
기획단계부터 황당무계한 판타지를 어떻게 스크린에서 펼칠지 관심을 모았던 작품. 소문처럼 영화는 현란한 영상을 선보인다. 테크놀로지만의 성장이
충무로에 바람직한지는 의문이지만, 순국산 CG작업과 와이어 액션은 한국영화의 수준을 한차원 올려놓은 것이 사실이다. 컴퓨터그래픽을 앞세운
어떤 한국영화보다도 뛰어나며, 요즘 유행하는 헐리우드 무술액션영화와 비교해도 크게 손색이 없다. 시종 관객의 혼을 빼놓는 스피드에, 테크노풍
음악도 절묘하다. 100% 디지털 작업으로 뽑아냈다는 ‘다크올리브그린’톤의 화면색상도 무협 판타지의 분위기를 상승시킨다.
“이 영화는 거대한 농담이다”
“영화를 통째로 컴퓨터에 담궜다 빼냈다”는 감독의 표현대로, ‘화산고’는 그래픽을 철저히 즐기는 영화다. CG가 주는 생경한 이미지가 무엇보다도
만화같은 스토리에 딱 떨어진다. 김태균 감독은 연출 기법도 전적으로 만화의 이미지를 차용했다.
자막과 사극풍 나레이션을 이용한 인물 소개, 유머러스한 캐릭터, 화면분할과 과장된 표정연기 등 만화적 상상력을 그대로 옮겨놓았다. 주인공
김경수(장혁)는 무협물의 영웅보다도 학원만화의 영웅에 가깝다. 건물에서 떨어져 바닥에 납작하게 엎어진다거나, 압정 방석을 엉덩이에서 떼어낼
때 붉으락푸르락 변하는 얼굴색, 어리숙한 표정으로 뜬금없이 V자를 그리는 모습 등이 영락없이 슬램덩크의 강백호와 닮았다.
그뿐이 아니다. 만수문축농부독초(만개의 수학 문제를 풀다가 생긴 축농증의 고름으로 썩힌 독초)니 사팔신공(학생들의 난처한 질문을 회피하는
교사들의 대표적 책략신공), 연초단폐장(담배피는 아이들의 기도를 막아 호흡을 곤란하게 만드는 무공), 인생종지부 등의 부적들은 이 영화가
‘농담’임을 말해주는 단적인 예이다.
완급조절 실패로 긴장감 떨어져
‘박봉곤 가출사건’이나 ‘키스할까요’에서도 보이듯, 김감독의 연출 감각은 오래전부터 만화적 판타스틱에 가까웠다. 김감독은 ‘화산고’에서
자신의 연출 스타일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익숙한 장르들을 뒤섞어 새로운 형식을 만들었다. 한국영화에서 전례 없는 ‘화산고’의 형식은 일본학원물과
중국무협이 배합된 것이다. ‘매트릭스’나 ‘와호장룡’, 또는 일본만화를 연상시키는 장면들이 진부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조폭영화에 비해서는
신선하다.
감각은 독특한데 뒤로 갈수록 허탈해지는 김감독의 전작처럼, ‘화산고’도 후반부로 갈수록 긴장감이 떨어지는 것이 흠이다. 눈을 즐겁게 하는
그래픽은 얼마든지 널려있지만, 비슷한 액션이 반복해서 펼쳐져 완급 조절에 실패했다. 스토리의 엉성함 또한 후반부를 단조롭게 한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단순함이나 뻔함을 탓하는 것이 아니다. 기승전결이 지나치게 흐리고, 인물과 갈등이 발전 없이 흐지부지 끝나는 경우가 많아 아쉽다.
장혁은 인상적인 표정연기로 만화적 캐릭터를 잘 소화해냈다. 12월 8일 개봉
정춘옥 기자 ok337@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