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현실과 비전향장기수 문제에 대한 빛나는 통찰력 ‘송환’
비전향장기수 노인들과 함께 한 12년간의 기록을 담은 ‘송환’은 작지만 큰 영화다. ‘한국전쟁과 그 후유증’에 대한 블록버스트들이 ‘스펙터클하게’
전국을 휩쓸고 있는 지금, ‘시기 적절하게’ 등장한 ‘송환’은 피투성이 전투장면 없이도 분단 참상을 생생히 전달하고, 설경구나 장동건
없이도 캐릭터 하나 하나를 가슴에 새기게 하는 놀라운 다큐멘터리다. 더욱 빼어난 점은, ‘송환’의 진정성이 정치적 메시지보다 인간에 대한
탐구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만남과 이별에 대한 감성 드라마
‘송환’은 겉보기에 ‘불편한’ 작가영화처럼 보인다. 일반적 선입견은 ‘송환’이 전향 공작의 잔인성과 비전향장기수들의 송환 운동에 대한
치열한 계몽영화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정치적 소재와 다큐멘터리에 대한 오해가 빚어낸 편견이다. ‘송환’은 현실 직시를 강요하는
무거운 고발 선전물이 아닌, 만남과 이별에 대한 한 편의 감성 드라마다.
실천적 다큐집단 ‘푸른영상’의 대표이자, 한국 다큐 1세대인 김동원 감독은 영화 전체에 자신의 목소리를 깔아 개인적 심리와 가치관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자기 고백적인 1인칭 시점은 최근 다큐계의 세계적인 흐름인 ‘오테르(auteur·작가)다큐’의 특징이기도 하다.
작가의 시선은 따뜻하면서도 담담하다. 처음에 ‘간첩’이라는 존재에 두려움과 호기심을 갖던 감독은 서서히 비전향장기수 노인들에게 인간적
교감을 느낀다. 자신의 자녀를 손자처럼 귀여워하는 남파 간첩 조창손(72)에게 정을 느끼고, 구둣발에 찍힌 고문의 상처를 보여주며 “구두
만드는 사람은 끄트머리를 좀 말랑하게 하란 말야”라며 웃는 김영식(72)의 얼굴에서 천진함을 확인한다.
하지만, 거침없이 ‘김일성 찬가’를 부르는 조창손의 모습에서 거부감을 느끼고, 납북자의 존재를 부정하는 신인영(72)의 단호한 태도에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고 말하기도 한다. 감독은 맹목적인 그들의 고집과 이데올로기의 차이 등에서 오는 괴리감 또한 숨기지 않음으로써
‘당신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의 사상의 자유를 위해 나는 함께 싸울 것이다’는 볼테르 경구의 당위성을 구체화한다.
감독이 그들과 갈등을 겪고 아픔을 끌어안으며, 차이를 넘어 인간적 유대감을 나누는 과정은 관객에게 고스란히 전이된다. 북으로 돌아간 조창손
선생이 김동원 감독을 아들처럼 생각한다고 말하는 장면의 폭발적 감동은 인간관계 사이의 감정을 섬세하게 포착하고 축적하는 1인칭 다큐의
힘이다.
가공되지 않은 진실의 위력
‘송환’은 한반도의 뒤틀린 역사와 분단현실에 대한 한국영화 사상 최고의 통찰력을 보여준다. 동시에 폭력과 저항이라는 인간 속성과 권력에
의한 개인의 희생이라는 철학적 문제까지 무리 없이 포괄한다.
5명에게 동시에 매를 맞으며 6백대까지 헤아리다 정신을 잃었다는 증언이나 딸 이름으로 된 편지, 포르노 잡지를 동원한 정신적 고문 등
이들에게 가해진 폭력의 수준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 혹독한 고통 속에서도 무엇이 그들을 견디게 했을까? 감독은 전향공작의 폭력에서 그들을
버티게 한 근본적인 힘은 바로 전향공작의 폭력성 자체라고 진단한다. 굴복하지 않는 저항 정신은 비인간적인 폭력에서 인간이기 위한 유일한
길이었던 것이다.
대한뉴스, 반공드라마, 북한 선전물 등의 캡쳐를 통해 ‘송환’은 권력자가 어떻게 역사와 대중을 움직여왔는지를 읽어낸다. 그리고 뉴스와
신문보도 등을 적절하게 배치해 비전향장기수 문제를 역사의 흐름에 녹여낸다. ‘송환’은 때로 한반도의 비상식적 정치상황에 대한 블랙코미디로,
때로는 신념을 위해 극한 고통을 견디고 50여년만에 귀향한 늙은 혁명가의 일대기로 다양하게 모습을 바꾸며 풍부한 주제를 풀어낸다.
다시 말하지만 ‘송환’은 결코 무겁거나 지루하지 않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극장을 찾는 대다수의 소시민, 혹은 정치적 투쟁에 대한 알레르기를
가진 신세대일지라도 ‘송환’에서 충분히 재미를 찾을 수 있다. 여교사를 강간한 뒤 자신들을 이해해달라고 응석부리는 마초들의 값싼 눈물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진한 감동이 ‘송환’의 투박한 영상에 담겨 있다. 얄팍한 감정을 자극하는 최루성 영화가 조미료 범벅인 인스턴트라면,
‘송환’은 가공되지 않은 자연식이다.
‘송환’은 한국 영화 사상 최초로 선댄스영화제에 진출, ‘표현의 자유상’을 거머쥐는 등 각종 국제 영화제에서 호평받았다. 또한, 예술영화관
협의체 ‘아트플러스와 독립영화배급사 ‘인디스토리’가 공동배급을 결정, 저예산 영화 배급에 대한 대안적 사례로도 주목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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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춘옥 기자 ok337@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