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간 들판에서 살아온 정몽준 의원이 무소속 생활을 접고 3일 한나라당에 전격 입당, 이명박 후보를 지지선언한 것을 놓고 벌써부터 정몽준-이명박의 20년 애증관계와 향후 박근혜 전 대표와의 차기 경쟁에 대해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지난 92년 고(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대선에 출마했을때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또 2002년 정 의원이 대권에 도전장을 내밀었을 때도 ‘재벌가의 후계자’라는 출신성분은 그에게 플러스라기보다는 마이너스 요소였다. 그러나 이번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의 ‘대기업 CEO’ 경력은 ‘이명박 대세론’을 형성한 주요한 근거였다. ‘경제성장’에 대한 기대감이 유권자들의 가장 큰 요구가 되면서 이를 충족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는 후보라는 게 각종 도덕적 하자에도 불구하고 이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지 않는 주요한 이유다. 때문에 정 의원도 결심을 굳혔는지 모른다.
한솥밥 다른길
현대그룹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두 사람은 이후 정계에 몸을 담는다는 공통점도 지녔지만 정치적 행보는 달랐다.
5선의 정 의원은 88년 13대 총선에서 무소속(울산 동구)으로 당선돼 정계에 입문했다. 이 후보와 부친이 결별한 92년 이후 정 의원은 사적인 자리에서 단 한번도 이 후보를 만난 적이 없다. 박형준 대변인은 “단 둘이 만나 얘기한 것은 3일 회동이 사실상 처음”이라고 말했다.
이같은 애증관계에서 정 의원이 이 후보를 택한 것은 이유가 있다. 바로 ‘몽파워’를 기대한 이 후보측의 러브콜과 대선 이후 박근혜 전 대표와의 경쟁관계 등을 염두한 사전 포석이다.
이를 반영하듯 한나라당은 천군만마를 얻은 분위기가 역력했다.
이명박 대통령후보를 겨냥한 대통합민주신당 측의 BBK연루의혹 공세와 임박한 검찰수사결과 발표와 ‘이명박 특검법 발의’ 등으로 생채기가 늘어가는 상황에서 울산지역에 지분을 가진 정몽준 의원의 입당은 큰 힘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울산 동구에서 내리 5번 당선된 정 의원의 영입으로 한나라당은 향후 16여일 남은 대선기간 동안 울산지역에 부동의 지지율을 확고히 함과 동시에 영남권을 중심으로 ‘이명박 대세론’ 굳히기에 박차를 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더욱이 이번 대선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현 정부의 실정에 대한 반감이 크게 작용하고 있는 가운데 2002년 대선 당시 노 대통령과 단일화했다가 막판 무산되면서 반(反) 지지세력으로 돌아섰던 과거 국민통합 21세력층의 흡수도 부수적 효과로 기대된다. 현대중공업 최대주주라는 점과 대한축구협회장이라는 정 의원의 이름값은 이번 대선에서 한나라당의 슬로건인 ‘국민성공시대’와 맞아떨어지기도 한다.
2002년 월드컵특수와 함께 4강의 성공신화를 이룬 국민들의 가슴 한켠에는 ‘정몽준’이라는 이미지가 남아 있고, 여수엑스포 유치와 함께 3대에 걸쳐 올림픽과 월드컵 유치라는 ‘트리플 크라운(Triple Crown)’ 신화를 일궈낸 것은 익히 공인된 사실이다.
정 의원의 부친인 고 정주영 현대그룹회장은 1988년 서울올림픽 유치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데 이어 정 의원은 2002 한.일 월드컵, 그리고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이 2012 여수엑스포 유치에 공을 세워 이같은 위업을 달성했다.
아울러 정 의원이 가진 ‘현대가(家)’의 이미지는 현대건설 CEO 출신인 이 후보가 이번 대선에서 “잘사는 국민, 따뜻한 경제, 강한 나라를 위한 실천하는 경제대통령이 되겠다”고 주창하고 있는 것과도 맞아떨어진다. 이에 대해 이 후보도 “정 의원의 입당이 대선을 앞두고 큰 힘이 되지만 그에 앞서 정 의원은 개인적으로 외교, 특히 스포츠외교에서 국위선양을 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몇 안 되는 인재라고 생각한다”고 평가했다.
그는 “정 의원의 입당으로 한나라당이 집권 후에도 국민에게 신뢰감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강재섭 대표도 “아침에 까치가 울더니 반가운 손님이 오셨다”고 말했고, 정두언 의원은 “부동층 표를 흡수하고 대세를 굳히는 효과가 크다”며 “2002년 대선 당시 노 대통령과의 후보단일화에서 보았듯 파괴력은 만만치 않다”고 말했다.
박형준 대변인은 “중도실용 정치세력이 한나라당을 주축으로 총결집해 집권기반이 더 튼튼해졌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한나라당은 정 의원의 영입으로 이같은 효과를 누림과 동시에 반(反)노무현 정서를 크게 부각시킴으로서 ‘정권교체’를 희망하는 세력의 확고한 지지를 이끌어낸다는 전략이다. 또 이번 대선을 ‘평화세력 대(對) 반평화세력’ 구도로 몰고 가려는 신당 측의 전략을 비틀어버리는 일석사조(一石四鳥)도 노려볼 만하다.
고 정주영 전 회장은 남북한간 긴장관계가 완연했던 지난 89년 소떼를 이끌고 직접 방북해 화해의 물꼬를 트는데 기여했으며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과 개성관광으로 이어지는 현대아산의 성과들은 ‘대북사업’의 대명사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신당 정동영 후보는 자신을 ‘개성동영’이라고 칭해 왔지만 현대가의 일원인 정 의원의 한나라당 입당은 이런 의미에서 타격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정 의원은 앞으로 이 후보 선대위 상임고문이나 최고위원직을 맡게될 것으로 알려져 이 후보 선대위 내에서도 정 의원 영입을 계기로 단기 시너지 효과 창출에 주력할 것으로 예상된다. 여기 더해 검찰의 BBK 수사결과 발표가 ‘무혐의’ 쪽으로 판명날 경우 박근혜 전 대표와 정 의원의 ‘쌍끌이 유세지원’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정 의원과 이 후보가 애증의 20년을 보내며 서로 다른 길을 걷다가 17대 대선에서 만난 이유다.
몽준-근혜 차기 경쟁?
정 의원의 한나라당 입당에 긴장한 것은 박 전 대표 측으로 보인다. 벌써부터 양측의 경쟁관계에 관심이 쏠리고 있기 때문이다.
한나라당 내에선 “두 사람이 차기 대권을 놓고 불편한 관계가 형성되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온다.
정 의원은 자신의 입당 소식을 박 전 대표에게 미리 알려줄 것을 한나라당 측에 요청했다고 한다. 한나라당 관계자는 “박 전 대표와의 관계를 고려한 정 의원의 요청에 따라 2일 박 전 대표에게 소식이 전달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박 전 대표도 이날 제주 유세에서 기자들과 만나 “정몽준 의원이 입당하고 같이하는 것을 환영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 전 대표 측 내부 기류는 달랐다. 박 전 대표의 한 측근 의원은 “정 의원 입당은 차기 대권 경쟁구도를 만드는 것으로, 박 전 대표의 시련을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주장했다. 다른 측근 의원도 “이명박 후보가 정 의원을 가리켜 말하는 것을 들으니 ‘총리 내락설’이 맞는 것 같아 발에 힘이 쭉 빠지더라”며 “정 의원의 입당이 박 전 대표 견제용이라는 건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장충초등학교 동기동창이다. 16대 대선을 앞둔 2002년 11월엔 당시 국민통합21 정몽준 후보와 미래연합 박근혜 대표로서 서울 여의도의 한 음식점에서 만났다. 정 후보는 1시간50분간의 대화에서 박 대표에게 “당대표를 맡아 달라”고 제안했다. 하지만 박 대표는 “내 정치적 소신과 안 맞는다”며 정 후보와의 연대를 거부했다. 이후 박 대표는 한나라당으로 복당해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후보를 도왔다. 정 후보는 민주당 노무현 후보와의 단일화를 통해 후보 자리를 내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