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 달구고 집념 메질한 외길 인생
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 방짜유기장 이봉주
안산
시화공단 내 ‘납청유기’ 공방에는 이른 아침부터 망치질 소리가 유난하다. 벌겋게 달궈진 놋쇠를 두드려 징을 만드는 손이 바쁘다. 옆에 다가가도
망치질에 열중이라 알아채지 못한다. 일이 끝나고 나서야 고개를 들어 손님이 온 것을 알아본다. 작업에 심취한 일꾼의 모습. 이것이 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 유기장 이봉주 선생의 첫인상이었다.
오기와 근성으로 오늘까지
방짜유기는 동과 주석을 16 대 4.5의 비율로 배합하여 만든 놋쇠를 말한다. 불에 녹인 쇳물을 틀에 부어 만드는 주물유기와 달리 불에
달군 놋쇠를 메질(망치질)해서 늘여가며 만든다. 현대적 장비를 도입하고 있으나 중요한 부분은 수작업을 유지하기 때문에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내 나이 77살이지만 그래도 직접 하는 게 맘 편해.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는 내가 해야지.”
30여kg씩 되는 무게를 집게로 번쩍 들어 망치를 내리치는 모습은 나이가 믿겨지지 않는다. 근 60년간 이 일을 해온 이 선생은 유기제작으로
유명한 평북 정주 납청 지역에서 태어나 자연스럽게 방짜 일을 배웠고 해방 후 월남하여 지금까지 한번도 이 일을 쉰 적 없다.
“60년대에 사람들이 스테인레스를 사용하면서 수요가 거의 없었어. 그때 너무 가난해서 그만 둘까도 했지. 그런데 내가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잖아. 배울 때도 너무나 힘들 게 배웠는데 오기가 나더라고. 한번 목표로 세운 걸 포기하기도 싫었고.”
세계에서 가장 큰 징 제작
그의 노력은 80년대에 들어서야 조금씩 인정받았다. 유기가 인체에 유해한 성분이 전혀 없는 무공해 금속이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정부와 학자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전통공예 기법도 인정받아 1983년도에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인간문화재가 돼서가 아니라 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좋았어. 조상들이 물려준 전통을 계승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거니까.”
이 씨의 유기 사랑은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그 진가가 발휘됐다. 그는 42cm 바라 400쌍을 무상으로 기증해 폐회식 행사에 쓰이게
했다. 문명이 발달한 지역에서만 사용한 것이 유기이기 때문에 “한국에 무슨 유기문화가 있냐?”고 무시하는 외국인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그때가 가장 기분 좋고 보람 있었지. 지금도 녹화장면을 종종 봐. 우리나라가 세계 최곤데 사람들이 모르는 게 아쉬웠어.”
그의 자존심은 1993년 세계에서 가장 큰 징을 만들면서 더욱 극대화됐다. 그동안 기록은 중국이 갖고 있었으나 지름 161cm, 무게 98kg의
‘특대징’을 만들면서 그 기록을 깬 것이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선생은 보란 듯이 해냈고 세계 기네스북에 등록됐다.
박테리아 박멸 효과 밝혀져
선생의 이러한 노고때문인지 방짜유기에 대한 관심이 점점 고조됐고 그 상황에서 영국 사우샘프턴대학 빌 키빌 교수가 “박테리아가 구리에 닿으면
실온 상태에서 4시간만에 죽는다”는 연구 결과(2001년)를 발표했다. 이것은 현대인들의 건강에 대한 높은 관심과 맞물리면서 수요의 증가를
가져왔다. 은제품처럼 유해물질이 닿으면 색깔이 변한다는 점도 일조했다. 현재 이 선생의 방짜유기는 청와대 만찬 식기와 일류 호텔 양식부,
뷔페부 등에서 야채통과 얼음통으로 쓰이고 있다.
“그 동안 무겁고 색이 변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잘 안썼어. 그런데 그것도 잘 몰라서 하는 소리야. 얇게 만드면 일반 사기그릇 무게랑 별
다를 것 없어. 요즘엔 재료도 좋아져서 색도 거의 변하지 않지.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일반 세제로 설거지만 잘해주면 돼. 써보지도 않고
안좋다고 생각하는 것도 선입견이야.”
단점이 보완된 데다 튼튼해서 반영구적이기 때문에 최근에는 반상기와 식기 제품과 같은 생활용품이 잘 팔린다. 꽹과리나 징 등 전통타악기는
문화상품으로 각광받고 있다.
“앞으로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에도 우리의 방짜유기를 알리고 싶어. 그래서 내 전 재산을 털어 방자유기촌을 만들고 있지.”
박물관에 전 작품 기증
그는 문경시 가은읍 1,200평 부지에 ‘납청방짜유기촌’을 조성하고 있다. 제자들에게 기술을 가르쳐 전통을 계승한다는 것이 우선 목표다.
일반인들에게도 관광지로 개방해 유기를 널리 알리고 세계에 우리나라의 문화를 선보일 것이다. 600평정도가 이번 12월중에 완공된다.
“내가 이 것을 완성하지 못하더라도 후대가 계속 이어나가길 바래. 그러기 위해서는 제자 양성이 중요하지. 사상이 맞고 정말 하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전수하고 싶어.”
현재 큰아들 이형근(45세) 씨가 이수자로 등록돼 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 일에 관심을 같던 아들이 대학졸업 후 전수자로 나서 지금껏
묵묵히 해오고 있는 것이다.
“계승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지만 강요는 할 수 없었어. 그런데 그애가 먼저 하겠다고 하더라고. 힘든 일인데 고맙지.”
가족들의 이해와 성원으로 그는 오로지 유기장으로 살 수 있었고 자신의 모든 작품도 2005년 완공예정인 대구시 방짜유기박물관에 기증하기로
했다.
“혹시나 나중에 불상사가 생겨 내 작품이 팔리는 것을 막고 싶어. 내가 지금까지 쏟아부은 정성이 모두 우리나라 전통보존에 기여되길 바래.
가족들도 이해해 줬지.”
선생은 작업도중 쇠똥이 튀어 한쪽 눈을 실명했다. 잃어버린 한 눈은 다른 것에 눈 돌리지 말고 오직 하나만을 보라는 하늘의 선물이 아니었을까?
상실을 통해 더 큰 집념을 쌓아낸 이봉주 선생. 한길만을 걸어온 사람으로서 그의 외곬수적인 유기에 대한 집착은 오늘도 힘차게 두드리는 망치소리가
되어 사방에 퍼지고 있다.
안지연 기자 (moon@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