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라”
허울뿐인 주한미군의 존재이유
지난
1993년 11월경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하면 북한이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는 미국 국방부의 비밀보고서 내용이 국내 언론에 밝혀지면서
국민들은 불안과 충격에 빠졌었다. 당시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는 “우리가 남북한의 부대 및 무기체계 등 각종 자료를 넣어 컴퓨터에 의한 모의전쟁(워게임)을
해본 결과, 낙관적으로 나왔다"며 불안한 민심을 수습했다.
낙관적 결과의 근거는 ‘북한의 기습을 가정할 때 전쟁 초기에는 한국이 밀리겠으나, 美국방부의 지적대로 1~2주내 서울이 점령당할 정도는
아니며, 침략 수일 만에 한ㆍ미 양국의 반격으로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었다. 국민들은 ‘미군의 반격’에 상당히 안심했었다. 미국
태평양함대가 오기만 하면 북한군은 일시에 무너질 줄 알았고, 그래서 북한은 7일 안에 남한을 점령해야한다는 ‘7일 침공설’이 나돌았다.
그땐 그랬다. 위대한 미군은 언제나 우리 편이어야 했고, 따라서 ‘주한미군 철수’를 외치면 빨갱이였고, 간첩이었다.
10년이 지났지만 상황은 바뀌지 않았다. ‘매항리 폭격장’, ‘한강 독극물 투하’, ‘노근리 양민학살’ 그리고 최근에 발생한 ‘여중생사망
사건’을 계기로 주한미군 철수에 대한 국민적 여론이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주한미군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억제하고, 동북아시아
평화 정착에 필요하다는 논리도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주한미군이 없으면 북한이 남한을 무력 침공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
미군 떠나도 북한 도발 없다
그러나 전문가들의 생각은 이와 다르다. 주한미군이 철수하더라도 북한이 남침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시각이다. 동국대 강정구
교수는 “남침은 북한의 자살행위”라고 지적했다.
실례로 1997년 북한의 국민총생산(GNP)은 겨우 177억 달러이고 남한의 97년 군사비는 170억 달러이다. 또 99년의 북한 예산은
겨우 94억 달러에 불과하다. 예산의 30%를 군사비로 쓴다하더라도 북한 군사비는 28억 달러밖에 되지 않는다. 이러한 군사비의 남북격차는
한 두 해가 아니라 80년대부터 지금까지 누적된 현상임을 고려하면 북한 군사력의 정도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북한의 군사력 열세는 한국 군당국도 인정하고 있는 사실이다. 육군본부가 99년에 만든 정훈교재에 기술한 ‘북한군이 국군을 두려워하는 5가지
이유’를 보면 명백히 알 수 있다. 첫째는 북한군은 만성적 영양실조 상태이며 체격도 엄청 작다는 것이다. “국군은 평균 신장 1백71㎝에
체중 66㎏, 북한군은 1백62㎝에 47∼49㎏ 수준으로 이는 복싱 웰터급과 플라이급 선수의 차이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둘째는“북한군은
유류, 탄약 등 군수물자를 아끼느라 제대로 훈련을 못하지만 국군은 첨단장비와 무기를 이용한 강도 높은 훈련으로 최강의 전투력을 유지하며
월남전과 걸프전에 참전한 간부들이 이끌고 있다.” 셋째, “북한군의 무기와 장비는 양적으로 국군보다 1.6배 많지만 육군무기의 40%,
해군 함정의 70%, 공군전투기의 65%가 폐기처분 직전의 노후장비”라는 점, 넷째 국력의 차이다. 교재는 경제력 격차를 10배 정도로
잡고 있으나 남한총생산액은 대략 20배정도로 북한을 앞지르고 있다. 마지막으로 한미연합방위체제라고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연합방위체제는
주한미군이 없더라도 전시접수국지원협정이나 한미일삼각군사동맹으로도 유지될 수 있다. 이같은 상황을 종합해 보면 주한미군이 없더라도 국군이
북한에 대한 전쟁 억제력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득보다 실이 많다
최근 여중생 사망사건의 여파로 주한미군 철수 주장이 제기되자 김대중 대통령은 “지금 미군이 우리나라에 와 있는데, 우리는 안보가 필요해서
있도록 하는 것이고 미국은 미국대로 안정을 위해 와 있다”며 “서로가 필요해서 있는 것”이라고 미군 주둔의 의미를 설명했다.
주한미군으로 인해 미국의 안보이익과 남한의 안보이익이 합치되는 몫이 있다. 하지만 미국에게 일방적으로 이익이 되고, 그에 반해 한국에게
일방적으로 손실이 되는 것이 너무나 많고 크다.
먼저, 정치적으로 한국은 정부 수립 이후 50년이 지나도록 미군에게 국가안보를 의존하고 있다. 이는 국가적 자주성과 역사적 정통성에 치명적인
결함을 주는 것이다. 한국은 정전 이후 반세기가 지났지만 아직도 전시 피보호국이라는 불안한 위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더욱 심각한 것은 군사부문의 장애다. 주한미군과 한국군은 별개의 체계로 제각기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미연합군으로 결합되어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결합이 대등한 결합이 아니라 예속적이라는 데 있다. 한미연합군의 지휘권은 주한미군사령관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나라들이 여럿 있지만, 한국처럼 나라의 군사지휘권을 미군에게 넘겨준 나라는 어디에도 없다.
그리고 경제적 손실도 만만치 않다. 한국정부는 해마다 주한미군 경비 분담금이라는 명목으로 4억 달러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을 미군에게 넘겨주고
있다. 지난 1953년 정전 이후 50년 동안 주한미군이 사용해온 토지는 4억 2,595만평으로 사용료를 달러로 따져보면 천문학적 비용이
나오는데, 한 푼도 받지 못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받아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또 지난 50년 동안 주한미군 때문에 생겨난 사회적 병폐도 심각하다. 주한미군의 4대 사회악은 기치촌 문제, 미군 범죄, 저급한 미국문화
유입, 미군 시설 및 훈련에 의한 환경오염 및 공해 발생이다.
‘미군’이라는 불안한 주춧돌
또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있다. 주한미군이 영구 주둔할 것이라는 한국 군당국의 ‘믿음’이 깨질 경우 어떻게 할 것이냐는 점이다. 1949년
주한미군의 일방적인 철수, 70년대 카터 행정부의 대규모 감축 계획, 80년대 말~90년대 초 부시 행정부의 3단계 감축계획, 그리고 94년
위기 당시 대규모 증원군 파견 계획 등에서 알 수 있듯이, 주한미군의 철수·감축·증강의 결정과 그 방식은 미국 자신의 이해관계에 의해 좌우되어
왔다는 점이다. 이같은 경향은 미래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주한미군의 존재가 미국 행정부의 교체, 미국 여론, 미국 국방비 지출 규모의 변화 등 미국 국내정치적 요인과 함께 대외환경의 변화에
따라 유동적인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주한미군에 의존하는 안보전략을 고집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한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미국이 상황에 따라 주한미군 철수·감축
카드를 꺼낼 때면, 이를 무마시키기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을 지출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릴 수 도 있다. 이것이 바로 “주한미군은 대규모로
영구 주둔한다”는 전제하에 21세기 한국의 안보전략을 짜고 있는 한국정부의 최대 약점 가운데 하나인 것이다.
고병현 기자 sama1000@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