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를 지배하는 위대한 가짜
스타 시스템과 사이버 시대에 대한 지적이고 날카로운 코미디 ‘시몬’
꿈속의 나비가
나인지, 현실의 내가 나비인지 묻는 장자의 ‘호접몽’은 사이버 시대를 사는 현대인에게 절실한 문제가 됐다. 우리는 매일 채팅을 하고,
메신저로 쪽지와 메일을 주고받지만, 대상의 실체는 확인되지 않는다. 인터넷 공간에서 사귄 10대 여자 친구가 실제로는 중년의 변태 남성일
수도 있다는 불안감은 일상적인 문제가 된지 이미 오래다. 우리는 현실의 돈과 시간을 들여 아바타를 치장하고, 지식과 힘을 키우고, 싸움을
하고 친구를 사귀면서 가상의 이미지를 통해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아바타는 ‘스타’와 비슷한 구석이 있다. 대중이 원하는 가상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 스타다. 대중들은 스타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스타의 이미지를 사랑하고 소비한다. 대중은 스타에게 이미지를 요구하고 제작자는 이미지를 만들며, 스타는 그 이미지를 내면화해서
대중에게 제시한다. 빈틈없이 짜여진 이 시스템은 거대한 속임수지만, 대중은 행복하게 속는다.
‘시몬’은 이 같은 문제들을 포괄하고 있는 영화다. 이미 자신이 대본을 썼던 ‘트루만 쇼’에서 앤드류 니콜은 미디어의 문제를 까발린바
있다. ‘시몬’은 ‘트루만 쇼’와도 닮았지만, 그의 첫 번째 연출작 ‘가타카’와도 상통하는 면이 많다. 테크놀로지의 암울함을 그린 ‘가타카’에
비해 ‘시몬’은 훨씬 가볍고 유머가 넘친다. 하지만, 궁극적 세계관은 ‘가타카’보다 어떤 면에서 더욱 어둡다. ‘가타카’가 모순된 시스템에
대한 인간의 반항과 도전을 그렸다면, ‘시몬’은 시스템의 철저한 지배와 힘을 확인시켜주기 때문이다.
내가 아바타를 만들었나, 아바타가 나를 만들었나
헐리우드의 감독 빅터 타란스키(알 파치노). 그는 자신의 천재성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이 야속할 뿐이다. 어렵게 시작한 새 영화 촬영도중
콧대 높은 여배우(위노나 라이더)의 불만으로 그의 영화는 제작이 중단될 위기에 처하게 된다. 궁지에 몰린 타란스키 감독 앞에 특별한
물건이 배달된다. 그것은 정교한 사이버 여배우 시몬(Simone; Simulation one의 약자)의 프로그램이 담겨있는 CD롬으로
타란스키 감독의 광적인 팬이자, 컴퓨터 엔지니어인 더글라스가 죽기 전에 남긴 유품이다.
결국 타란스키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 시몬을 출연시킨다. 영화가 개봉되자 시몬은 하루아침에 인기 스타로 떠오르고 영화는 대성공한다. 타란스키는
세상을 속였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타란스키는 팬과 제작사를 속이며 시몬을 여주인공으로 내세운 영화를 계속 제작한다.
뿐만 아니라 토크쇼, CF출연, 심지어 홀로그램을 활용한 콘서트까지 개최하며 시몬은 세계적 스타로 승승장구한다.
대중은 빈틈없이 완벽한 시몬에 매료되고, 언론은 존재하지 않는 어린시절과 스캔들까지 제조하면서 스타 만들기에 합세한다. 시몬을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시몬을 조정해 자신의 영화를 만들려고 했던 타란스키의 야망은 죄책감을 넘어 질투심이라는 벽에 부딪친다. 대중이
작품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시몬만을 추종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당신이 시몬을 만든 것이 아니라 시몬이 당신을 만들었죠”라는
아내이자 제작자 간부인 일레인(캐서린 키너)의 말처럼, 자신의 ‘아바타’였던 시몬은 오히려 자신을 지배하고 조종하는 존재가 된다.
심각한 메시지 대중적 코드로 전달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이 ‘여배우 사기극’은 곧 현실로 닥칠법한 일이다. 실제로 요즘 배우들이 영화에서
디지털 작업을 통해 몸매와 얼굴을 다듬는 일은 흔하다. 전문가들은 가까운 미래에 사이버 캐릭터들이 판을 칠 것이고, 실재 배우와 사이버
캐릭터를 구별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해질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문제는, 가상의 배우에게 열광하는 미래의 불특정한 상황에 대한 우려가
아니다. 이것은 생생한 현실이다.
매니저의 철저한 계산에 따라 옷을 입고, 토크쇼에 나가 대본대로 말을 하는 스타는 어짜피 만들어진 것이다. 스타가 실존인물이든, 가상인물이든
의미는 같다. 마돈나나 제임스 딘이 실존인물이라도 보통 사람은 평생 마돈나와 함께 식사를 하거나, 제임스 딘의 손을 잡는 일을 경험하지
못한다. 대중은 구차한 진실보다 달콤한 허구를 원한다. 그리고 허구는 진실보다 더 큰 위력을 발휘한다. 모든 것이 조작된 가짜라도 대중의
열광은 진짜다. 진실과 거짓, 진짜와 가짜의 새로운 가치판단을 요구하는 시대인 것이다.
씁쓸하고 머리 아픈 내용이지만 영화는 깔끔한 연출이 돋보이는 코미디다. 가상과 실재의 경계, 현대인을 지배하는 거대한 시스템과 미디어의
문제, 헐리우드에서 축소되고 있는 감독의 위치와 기능 등 여러 가지 심각한 메시지를 영화는 대중적 코드에 재치있게 녹였다. 알 파치노는
쇠퇴하는 명성을 살리려고 전전긍긍하는 감독 역에 썩 잘 어울린다. 주인공에 대한 측은지심이 너무 늙은 알 파치노에 대한 감정인지, 캐릭터에
대한 감정인지 구분하기 힘들다.
정춘옥 기자 ok337@sisa-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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