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 속에 새긴 ‘전통 사랑’
국내 유일의 박음상감 공예가 유승헌 씨
작업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했다. 살림집 구석방에 책상 하나, 의자 둘, 연장 몇 가지. 그곳에서 박음상감의 전통을 잇고있는 유승헌(42세) 씨가
일하고 있었다. 웃으면서 반기는 그의 모습은 장인이라기보다 그저 평범한 아저씨였다. 그러나 대화도중 그가 보여준 소신과 자부심은 진정한
장인의 모습이 무엇인지 말해주기에 충분했다.
부친 작업실에서 자연스럽게 배워
박음상감은 청동, 구리, 철 등 각종 금속제품의 표면에 홈을 파고 그 안에 금실이나 은실을 박아넣는 금속조각기법이다. 박물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청동은입사 향로 등이 그 기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신라시대부터 있었다고 하며 고려시대에 가장 발전했고 조선시대 말까지 전수됐다.
일제시대가 되면서 표면에 홈을 만든 다음 은실을 모양내어 두드려 붙이는 붙임상감이 도입되어 밀려나게 됐다. 박음상감이 훨씬 오래 보존되지만
공정이 어렵고 시간과 노력이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박음 상감이 재현된 것은 유승헌 씨의 부친 유적선(1997년 80세에 작고) 옹에
의해서다. 안성유기에 조각넣는 일을 하던 유적선 옹은 어깨너머 배운 기술을 바탕으로 문헌자료를 연구하여 박음 상감 재현에 평생을 바쳤다.
유승헌 씨는 그 기술을 자연스럽게 전수받았다.
“살림집과 붙어 있어 어릴 적 아버지 작업실에서 자주 놀았죠. 제가 형제 중 셋째인데 유독 다른 형제보다도 연장갖고 노는 것을 재밌어 했어요.
그러다보니 연장이 손에 익게되고 아버지의 기술도 배우게 됐죠. 꼭 그래야 겠다는 사명감없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익히게 됐어요.”
“그만두면 전통기술 하나 끊기는 것”
그러나 박음상감을 배우는 길은 결코 쉽지 않았다. 기계로 홈을 파는 일은 평평한 물체에만 가능해 굴곡이 있는 향로나 촛대 등에는 사용할
수 없다. 또 기계로 하면 밋밋하게 파져 금실이나 은실을 박았을 경우 쉽게 빠지게 된다. 그래서 박음상감은 직접 손으로 작업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그만큼 고통도 뒤따랐다. 얇은 정을 손가락으로 꽉 잡고 장시간 해야하는 일이라 살이 눌려 아리고 아팠다. 또 세밀한 작업이라 눈도
피로하고 시력도 매우 떨어졌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힘든 것은 경제적 어려움이었다. 주문도 뜸하고 어쩌다 사러오는 사람들도 헐값을 요구했다. 유승헌 씨는 공사장 막일과
휘장용품 조각 등의 부업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하지만 그만 둘 수는 없었어요. 제가 그만 두면 전통기술 하나가 끊어지는 거잖아요. 그리고 아버지의 평생 과업을 수포로 돌리는 일이 되고요.”
1998년 그의 노고가 드디어 인정받은 일이 있었다. 서울시가 지정하는 금속공예 기능보유자가 되어 지원금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차례 지원으로 끝나버린 ‘이벤트’였다. 기쁨은 곧 허탈감으로 변했고 유승헌 씨의 이름은 현재 서울시 기능보유자 명단에서 찾을 수 없다.
“지속적인 지원이 없었어요. 그때 한창 사라지는 전통에 대한 관심이 커져있어 이벤트성으로 행해졌던 것 같아요. 그리고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죠.
오히려 상처만 입은 채요.”
대중 홍보 절실
아쉬움을 토로한 유승헌 씨는 “그래도 관심갖는 이가 조금씩 생기고 있다”며 희망을 잃지 않았다. 현재 종로구 관훈동에 위치한 경인미술관에서는
내년 5월 완공예정으로 미술관 내부에 도검전시장을 건립하고 있다. 미술관 관장의 도움으로 그곳에 유승헌 씨의 작품을 전시, 판매하는 공간이
마련된다. 또 육군박물관 문화홍보담당 김성혜 씨도 도검 복원과 그 외 사업을 통해 유 씨의 기술이 세상에 알려지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사라지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는 분들이 도움을 주기 위해 애쓰고 계시죠. 그런 분들이 있기 때문에 그래도 힘이 나요.”
항상 믿음으로 지켜봐 주는 아내의 성원도 큰 힘이 된다.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홈패션 일을 하고 있는 아내는 불평 한마디 없이 늘 성원해준다.
어리지만 아버지가 하는 일을 자랑스러워하는 12살 아들과 7살 딸도 그가 일을 계속 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다.“아이들이 더 컸을 때도
저를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도록 열심히 할 거에요. 제가 지금 이 일을 포기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죠.”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유 씨는 노동부 산하 산업인력관리공단이 주관하는 민족고유기능 전승자 선정지원 등록을 준비하고 있다. 내년 5월에
접수하여 심사 후 9월에 발표하는데 5년간 지속적인 후원을 받을 수 있다.
“재정적인 지원을 떠나서 대중들에게 홍보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거죠. 박음상감 기술과 우수성을 널리 알리는 것이 가장 중요해요.”
‘장인’의 칭호가 없는 장인
그의 바람은 박음 상감이 널리 알려져 소비자도 늘고 후원자도 생겨 다양한 제품을 만드는 것이다. 지금도 대중이 쉽게 구입할 수 있는 저렴한
선물용을 만들고 싶지만 여건이 되지 않는다. 도자기 제품처럼 도공이 혼자 다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가능하겠지만 박음상감 제품은 외형을 만들어줄
업체와 그림도안 디자이너와 교류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공방을 차려 제자 양성도 하고 싶다. 제자가 되겠다고 찾아 온 사람이 몇 있었으나 작업실이 좁아 받아들이지 못했다. “굶어 죽겠다”며
그냥 돌아간 사람도 있었다.
“전통계승이 불가능해질까 걱정돼요. 무관심 속에 외면받고 있는 현실도 답답하고요. 인정받는 시대가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유승헌 씨는 아버지 유적선 씨가 했던 말 중에 “네 시대에는 된다”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그 시대가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아버지의 말처럼 박음상감 기법이 인정받는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정부로부터 ‘장인’의 칭호를 받지 못했지만 장인임에 분명한 사람. 아버지가 평생을 바쳤고 그 뒤를 이어 자신 또한 평생을 바칠 각오를 한
사람. 유승헌 씨는 유적선 옹을 대신해 제1호 박음상감 입사장으로 선정되길 기대한다. 그 기대가 이루어져 아버지 묘에서 “당신의 말씀이
옳았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기를 고대한다.
일에 대한 강한 애착과 신념을 가진 그의 마음에는 아버지로부터 물러받은 전통에 대한 소신이 박음상감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