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12일 오후 2시 대구지방법원 제11호 대법정. 이날은 일반국민이 형사재판에 배심원으로 참여하는 국민참여재판이 처음 열렸다. 이날 재판에는 첫 배심재판에 쏠린 국민적 관심을 반영하듯 취재진을 포함한 200여명이 방청했다. 법정에 설치된 100여개의 좌석이 모자라 절반가량은 서서 재판을 방청했고 AP통신 NHK 아사히신문 등 외신의 관심도 뜨거웠다.
재판은 오전 10시 배심원을 선정하는데서 출발했다. 일단 법원이 보낸 출석 통지서를 받은 230명 중 87명의 배심원 후보가 출석했다. 앞서 실시된 모의재판에 전체 배심원 후보 가운데 10% 정도만 법정에 출석했던 것과 비교하면 고무적이라는 평가다.
처벌보다 관용
비공개로 진행된 선정절차에서는 87명의 후보자 중 무작위로 추첨된 12명이 배심원석에 서면 검사와 변호사가 질문을 통해 기피신청을 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두시간 가량의 선정절차를 거쳐 9명의 배심원과 3명의 예비 배심원이 뽑혔다. 남성과 여성이 6명으로 동수였고 주부 4명, 회사원 3명, 자영업 2명 등의 다양한 직업군이 뽑혔다.
대구지법 윤종구 부장판사의 심리로 진행된 이날 재판은 한편의 미국의 법정 드라마를 보여줬다. 뜨거운 관심 속에 진행된 이날 재판은 배심원들이 재판에 공정하게 임한다는 선서를 하면서 시작됐다. 강도상해 혐의로 구속기소된 피고인 이모(27)씨는 수의차림으로 법정에 나섰다. 교통사고 합의금을 구하기 위해 지난해 12월 월세방을 얻으러 온 것처럼 속여 금품을 빼앗으려다 반항하는 집주인 A씨(70세 여)를 폭행한 뒤, 피해자가 피를 흘리자 병원으로 데려갔다 주민의 신고로 붙잡혔다.
검사는 배심원들에게 공소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현장사진과 범행 재연 사진 등을 대형 화면으로 공개했다. 이어 피고인이 사전계획을 치밀하게 세운 뒤 흉기로 위협하고 돈을 뺏으려 했다는 점을 주장하면서 사용된 흉기를 증거물로 제시했다. 사건을 맡은 최창민 검사는 “피고인의 딱한 사정은 알지만 죄를 지은 사람에게는 벌을 줘야 한다. 배심원은 국민으로부터 판결을 위임받은 것이므로 신중한 결정을 내려달라”고 당부했다.
반면, 변호인 측은 피고가 사채업자들로부터 협박을 받아온 점과 딱한 가정환경 등을 강조하며 선처를 부탁했다. 피고가 비록 사전에 범행계획을 세웠으나, 우발적인 폭행이었고 목격자에게 대신 신고해 줄 것을 요청하는 등 자수한 점을 부각시켰다. 전정호 변호사는 “피고인의 죄는 중형에 마땅하나 피고인이 잘못을 뉘우치고 깊이 반성하고 있다. 장기간 사회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 맞는지 피해자에게 보답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맞는지 현명한 판결을 내려달라”고 호소했다.
법률적 잣대보다 심리적 요인 작용
검찰과 변호인 측은 재판부 위주로 진행하던 법률공방을 배제하고 배심원을 설득하기 위한 법리공방을 벌이는 데 최선을 다하는 분위기였다. 어려운 법률 용어를 피하고 가급적 천천히 논리를 전개해 나가는 방식으로 배심원의 이해를 도왔다. 윤종구 부장판사는 재판 진행 중 수시로 “이해가 잘 안된 대목이 있으면 다시 얘기하겠다”며 배심원을 배려했다.
오후 5시45분 예비 배심원 3명을 제외한 9명의 배심원들은 평의실로 이동, 열띤 평의 절차를 벌였다. 평의와 선고결과를 앞두고 법정은 긴장감이 돌았다. 드디어 배심원은 변호인 의견을 받아들여 만장일치로 집행유예형을 내리는 것이 옳다는 의견을 재판부에 제시했다.
7시30분 재판부는 “피고인의 강도상해죄는 인정하나 변호인 주장대로 피고인이 자수를 한 사실을 인정해 집행유예를 결정한다”고 판결했다. 양형과정에서도배심원들은 검찰이 구형한 징역 5년의 절반인 징역 2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으로 모아졌다. 이에 따라 재판부는 피고인 이씨에게 징역 2년6월에 집행유예 4년, 보호관찰 4년, 사회봉사명령 80시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배심원들의 의견이 헌법과 법률에 반하지 않는다고 판단, 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판결했다. 첫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된 이번 판결은 배심원의 의견이 상당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전정호 변호사도 “이번 판결은 배심원단의 의견이 크게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피고인에게는 기존 재판에 비해 유리하게 작용한 것 같다”고 말했다.
때문에 배심원들이 법률적 잣대가 아닌 심리적 요인에 의해 판결에 영향을 받을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조영곤 대구지검 2차장검사는 “피고인들이 배심원 앞에 설 때면 범행을 저질렀을 때와 달리 상당한 시일이 지난 뒤여서 다른 사람으로 비칠 수 있다”며 “이 경우 자칫 범죄행위보다 이후 사정들이 처벌에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참여재판에선 배심원의 ‘상식’이 유.무죄 판단의 주요기준이 된다. 그만큼 국민이 체감하는 법감정과 생각이 법정에서 판결에 녹아들어갈 여지가 커지는 셈이다. 이번 재판은 의미는 역사적 의미는 크지만, 해결할 과제는 많이 남아 있다. 법조계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적지 않다. 오세욱 신임 광주지법원장은 “국민참여재판은 제도 도입의 의미는 크지만 시행상 적잖은 어려움이 예상된다”고 평가했다. 그는 미국과 일본을 예로 들었다. 설령 재판부가 오판을 해도결과에 승복하는 미국과 달리 국내에서는 자신이 재판받는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기 꺼려하는 풍조 등으로 인해 판결에 승복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지나친 배심원 배려 말아야
또한 현행 배심재판은 미국 법정의 배심제와 다소 성격이 다르다. 미국식은 배심원이 유.무죄를 평결하면 법관은 그대로 따라야 한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배심원의 유.무죄 평결과 양형 의견은 권고적 효력에 그칠 뿐 따를 의무는 없다.
이재홍 신임 청주집법원장도 “국민참여재판을 운영하는 문제가 그리 쉽지는 않을 것이며 이 체제가 얼마나 유지될 수 있을지 걱정”이라며 “이미 제도가 시행된 만큼 조기에 정착될 수 있도록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효율성 부족과 지나친 배심원 배려, 감성에 호소하는 변론 등도 개선할 점으로 지적됐다. 재판을 지켜본 한 변호사는 “배심원을 위한 배려만이 가득한 재판보다는 피곤인의 범죄를 중심으로 한 법정이 돼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재판소요 시간에 대해 이 모씨는 “일반인이 보기에 사건이 복잡해 보이지 않는데 이 정도 시간과 노력이 소요된다면 전문 법률가로부터 재판을 받는 것보다 무엇이 효율적인지 의문”이라고 비판했다. 일부 시민들은 출석하지 않을 경우 부과될 200만원 이하의 과태료 때문에 참석했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자동차 부품가게를 운영하는 강 모씨는 “시민참여도 좋지만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입장에 벌금이 무서워 법정에 나오려니 부담이 가는 것은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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