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 2002 노무현 대통령 당선>
대쪽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야인으로 돌아간 이회창 |
“제가
선 이 길이 합당치 않으면 날 제쳐 주시고, 그렇지 않다면 나라와 국민을 위해 뛸 수 있도록 붙잡아 주십시오”
대선기간 중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가 하루를 마무리하며 드리던 간절한 기도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대선 다음날인 이 후보는 “저는 국민 여러분의 선택을 받는데 실패했고, 여러분이 내린 선택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것”이라면서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굴곡진 정치 6년의 회한을 참을 수 없었던지 이 후보는 눈물을 흘리며 정치인 이회창의 옷을 벗었다.
굴곡진 지난 6년
6년 전, ‘대쪽 대법관’ ‘성역을 타파한 감사원장’ ‘소신 총리’를 끝으로 야인으로 돌아갔던 이회창은 1996년 한나라당 15대 총선
선대위 의장을 맡으며 화려하게 정계에 입문했다.
그는 신한국당의 총선 압승을 이끌어 내면서 탄탄한 입지를 마련했다. 그러나 97년 1차 대권 고지는 결코 녹록치 않았다. 그는 두 아들
병역문제 등으로 인해 다른 어느 후보보다도 혹독한 ‘정치적 검증’을 받으면서 타격을 입었고, 이후 이인제 후보의 탈당과 비주류의 흔들리기에
시달리다 97년 대선에서 39만표 차이로 패하고 말았다.
1997년 대선 후 당 명예총재로 정치일선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던 그는 98년 8월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제1야당 총재로 전면에 복귀했다.
원내 제 1당의 총재가 됐지만 그의 험로는 계속됐다.
김대중 정부 들어 세풍(국세청을 동원한 대선자금 조달 혐의), 총풍(휴전선 긴장조성을 위해 북한 측에 무력도발을 요청한 혐의), 안풍(15대
총선에서 안기부 자금의 신한국당 유입 혐의)으로 정치적 곤경에 처했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그는 반(反)DJ세력의 구심점으로서의 위치를
굳혔고, 가장 강력한 차기 대통령감으로서 확고부동의 인물로 평가됐다.
특히 2000년 4월, 16대 총선을 앞두고 그는 김윤환, 이기택, 신상우 전 의원 등 당내 계파 수장들을 전격적으로 낙천시켰다. ‘대학살’이라고
말하지만 그의 정치개혁은 총선 승리로 이어져 확실한 야당 지도자로 거듭 태어났다.
이후 여권의 각종 실정과 부정부패 등에 힘입어 ‘이회창 대세론’을 난공불락의 요새가 되었다. 올해 초 ‘빌라게이트’가 터지고 박근혜 의원이
탈당하는 등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그가 이끄는 한나라당은 각종 선거에서 승승장구했다. 이대로만 간다면 거칠 것이 없는 듯했다.
또 다시 고배를
하지만 반 DJ 정서라는 최대의 무기를 너무 과신한 탓인지, 2000년 총선과 올해 지방선거 그리고 각종 재ㆍ보궐선거에서 재탕삼탕 우려낸
‘부패정권 심판’이라는 반 DJ 구호는 더 이상 대선을 좌우할 수 있는 위력을 갖지 못했다.
대선에서 ‘국정원 도청 폭로’와 같은 낡은 네거티브 방식에 기댄 그는 세대간 대결 양상으로 벌어진 16대 대선에 기민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결국 두 번째이자 마지막이 될 대선에서 또 다시 패배의 쓴잔을 마셨다.
고병현 기자 sama1000@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