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 2002 노무현 대통령 당선>
빈농의 아들에서 대통령으로 노무현 당선자의 드라마틱한 인생역정 |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풍운아’ 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닌다. 그 한마디에 그가 살아온 인생역정이 잘 축약되어 있다. 산골소년에서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기까지 그는 진정 드라마틱한 인생을 살았다.
‘돌콩’이라 불린 아이
노무현 당선자는 해방 이듬해인 1946년 8월6일(음력) 경남 김해군 진영읍 봉화산 자락에서 빈농의 3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노판석(76년 작고)씨와 어머니 이순례(98년 작고)씨는 척박한 땅을 일구며, 어렵게 살았다.
유난히 키가 작았던 탓에 ‘돌콩’이라 불렸지만 노무현은 제법 똑똑한 아이였다. 여섯 살 때 천자문을 줄줄 외웠고, 대창초등학교와 진영중학교
시절 1등을 도맡았다. 그러나 그는 당시 가난에 대한 열등의식에 사로잡힌 거친 반항아였고, 자존심과 우월의식이 무척 강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학교 입학할 때의 일화는 어린 노무현을 잘 보여준다.
진영중학교에 시험을 치른 그는 입학금이 없었다. 친구로부터 “입학 때 책값만 내고, 봄 농사를 지어 갚기로 하고 입학허가를 받은 사람이
있다” 는 얘기를 듣고 어머니와 함께 교감을 찾아갔다. 교감은 농사나 배우라며 거절했고, 서럽고 분한 마음에 어머니는 눈물만 떨어뜨렸다.
그는 그 자리에서 입학원서를 북북 찢으며, “가요! 이 학교 아니면 학교가 없나” 하며 문을 박차고 나왔다고 한다.
가난은 살아가는 동안 노무현의 발목을 잡는 장애물이었고, 늘 시련과 상처만 남겨주었다. 그가 사법고시에 합격하기 전까지 그랬다.
1963년 부산상고에 진학한 노무현 당선자는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했고, 그의 방황은 졸업 후에도 계속되었다. 그가 고시 공부에 본격적으로
나선 것은 1973년 결혼 이후였고, 1975년 드디어 사법시험(17회)에 합격했다.
그 길이 가시밭길일지라도
노 당선자는 초임 판사 시절, 변호사들에게 밥이나 술을 얻어먹고 다니며 부끄러운 짓도 많이 저질렀고, 1978년 변호사로 개업해서도 법원과
검찰 직원들에게 사건 알선 커미션을 건네고, 판ㆍ검사들에게 술을 사기도 했다. 또 당사자간에 합의가 가능한 사건도 수임료를 돌려주지 않기
위해 서둘러 처리해버린 적도 있었다.
그런 그에게 1981년 ‘부림사건’ (5공 정권의 부산지역 민주화세력에 대한 용공조작사건)은 인생을 바꿔놓는 전환점이 됐다. 그는 57일
동안 경찰에 구금돼 고문당한 학생들의 공포에 질린 눈과 시커멓게 죽은 발톱을 목격하고 충격에 빠졌다.
1982년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의 공동변론으로 故 조영래 변호사와 교류하며 인권변호사로 거듭났고, 85년 송기인 신부와 부산민주시민협의회를
만들면서 아예 거리로 나섰다. 1987년 9월 최루탄에 맞아 사망한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 씨 사건 사인규명 작업에 나섰다가 구속돼 변호사
업무정지 처분까지 받았다.
그러나 인생의 반전은 다시 한번 찾아왔다. 1988년 4.26 총선(13대)을 앞두고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에 의해 5공실세 허삼수
후보의 대항마로 영입돼 부산 동구에서 금배지를 닮으로써 제도권 정치에 입문했다.
초선 노무현은 1988년 5공 청문회에서 다른 여야 의원들이 깍듯이 예우한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등 힘 있는 증인들을 정연한 논리와 송곳
질문으로 몰아세워 TV로 시청하던 국민을 열광시키면서 일약 ‘청문회 스타’로 부상했다.
부산이 만든 정치인 광주가 만든 대통령
그러나 정치인 노무현의 봄날은 오래가지 못했다. 1990년 3당 합당 이후부터는 춥고 배고픈 시절의 연속이었다. 대다수 의원들은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굴로 들어간다”며, YS 뒤를 따랐으나, 그는 “역사적 반역” 이라며 정치적 소신을 고수했다. 이는 12년이 지난 지금 노
당선자에게 커다란 정치적 자산으로 되돌아왔지만, 당시에는 기나긴 가시밭길의 시작이었다.
1992년 총선(14대), 1995년 부산시장, 1996년 총선(15대)에서 모두 패배했다. YS 곁을 떠난 그를 부산은 더 이상 받아주지
않는 듯했다. 98년 서울종로 보선에서 어렵사리 금배지를 달았지만 2000년 4·13총선(16대) 때 ‘지역구도 극복’을 내걸고 다시 부산으로
향했다. 그는 “이번에 밀어주면 대선에 출마하겠다”고 호소했으나 결과는 참패. 반(反)DJ의 부산 정서 앞에 또다시 무릎을 꿇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는다”며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바보’ 라고 불렀고, 그의 우직한 정치 소신이
평가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2000년 총선에서 패배한 노무현에 대해 민주당의 눈길은 싸늘했다. 그의 영남득표력이 의심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네티즌’이라는
신기루와 같은 열성 지지자들이 노무현을 일으켜 세웠다. 당시 누구도 이들이 노풍을 만들어 내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래서 민주당 국민경선이 시작되는 그 순간까지 노무현의 반전은 불가능한 목표처럼 보였다. 그는 기자들에게 “민주당 대선후보 되기가 어려워
그렇지 후보만 되면 이길 수 있다” 고 외쳤지만, 공허한 울림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2002월 3월 16일 광주가 노무현의 손을 들어주면서 국민경선의 혁명이 일어났다. 이때부터 불기 시작한 노풍은 노도광풍이 돼 국민경선을
휩쓸었고, ‘이회창’이라는 거대한 산도 단숨에 넘어섰다. 부산이 정치인 노무현의 고향이라면 광주는 대통령 노무현의 요람이 되었다.
하지만 12월 19일까지의 8개월 대장정은 노무현 당선자가 걸어온 과거 10여년의 정치적 고행을 압축시켜 논 듯했다. ‘DJ의 친인척비리’
‘지방선거 참패’ ‘노무현 흔들기’ ‘탈당’ ‘배신’ 등 그 앞에 놓여진 정치지형은 지뢰밭이었다. 그러나 그는 시련과 핍박에 굴하지 않고,
정면 돌파로 국민 앞에 당당히 섰다. 그리고 마지막에 웃는 자가 되었다.
고병현 기자 sama1000@sisa-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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