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평] ‘손때 묻은 동화 옛날의 사금파리’>
소녀 박완서가 들려주는
‘그때 그 시절’
유년의 자화상 그린 ‘손때 묻은 동화 옛날의 사금파리’
한 작가에게 유년의 기억은
그의 문학이 형성된 발원지이자 예술적 자산이다. 박완서 역시 예외는 아니다. 박완서의 이야기 보따리는 상당부분은 유년의 기억이 차지하고
있다. 더구나 일제치하와 6.25를 통해 전쟁과 궁핍의 시대를 겪은 작가의 개인사는 곧 한국역사다.
‘미망’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등을 통해 자전적 소설을 다수 집필한 원로작가 박완서(71)는 이번에 유년의 기억만을 독립시킨
동화집을 펴냈다. ‘옛날의 사금파리’는 20년 전 육아잡지 ‘엄마랑 아기랑’에 연재됐던 작품을 화가 우승우의 삽화와 함께 엮은 것이다.
가난하지만 넉넉했던 사람살이
‘옛날의 사금파리’는 개성의 시골 마을에서 할아버지 할머니와 살던 ‘내’가 여덟 살 어느 봄날 엄마의 손에 이끌려 서울로 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서울에서 만나는 낯선 풍경과 궁색한 살림살이, 초등학교 입학시험, 예쁜 서울아이들에게 느낀 부러움, 밤이 새도록 듣고 싶었던 엄마의 옛날이야기
등 1930년대 생활과 풍속에 대한 묘사와 솔직한 감정 표현이 흥미롭게 전개된다.
뒤란에서 소꿉장난과 숨바꼭질을 하며 놀던 시골에서와 달리 서울 빈민가로 이사온 ‘나’는 이웃집 아이와 감옥소 홈통에서 미끄럼을 타면서 논다.
초등학교 입학시험을 치르기 전날 그토록 동경하던 이발소에 처음 들어가 머리를 자른다. 그러나 학교에서 만난 서울아이들의 세련됨에 주눅이
들고 촌뜨기라는 생각에 스스로 외톨이가 되기도 한다. 겨울방학 때 모처럼 시골 할아버지 댁에 가서는 서울아이의 자만심을 뽑내려고 스케이트를
타다가 비웃음을 산다.
작가는 과장되지 않은 동심의 묘사와 유려한 문체로 향수를 간직한 독자에게는 사탕같이 달콤한 추억을, 신세대에게는 ‘상실한 시대의 가치’를
일깨워준다. 국민적 작가의 문학적 토양을 이룬 결정적 사연들을 찾는 재미도 솔솔하다.
작가는 “과거에는 세상이 온통 남루하고 부족한 것 천지였지만 나름대로 행복했노라고 으스대고 싶어서 썼다”며, “나의 옛날 그리움이 결핍과
궁상이 아니라 어떡하든지 그걸 덮어주려는 가족간의 사랑과 아이들 스스로의 창조적인 상상력이라면 좀 말이 되려나 모르겠다”고 집필 의도를
밝혔다.
한국적 정서 묻어나는 삽화
‘옛날의 사금파리’ 외에도 서재에 잠들어 있던 짧은 동화 4편이 함께 실렸다. 아기라는 생명의 존재가 세상과 주변을 변화시키는 과정을 담은
‘참으로 놀랍고 아름다운 일’, 비뚤어진 자연의식을 엄하게 꾸짖는 ‘산과 나무를 사랑하는 방법’, 환쟁이(화가)와 중매쟁이 부부의 아름다운
사랑과 예술혼을 담은 ‘쟁이들만 사는 동네’,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을 덧없이 소멸해버리는 인생과 대비한 ‘다이아몬드’가 그것. 하나같이
박완서 특유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자질과 박진감 넘치는 문장이 잘 살아있다.
이 책은 박완서의 자전적 동화라는 것 외에도 우승우의 삽화를 주목해야 한다. 최근 도서의 시각적 영역이 넓어지는 추세다. 삽화도 더 이상
글을 보좌하는 수준이 아니라, 한 권의 책을 완성시키는 작품의 일부가 됐다. 한지를 연상시키는 책의 재질과 함께 한국의 정서가 자연스럽게
묻어나는 우승우의 그림은 자체로도 충분히 가치 있다.
정춘옥 기자 ok337@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