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리우드에서 부활한 동양의 우물귀신
리메이크 공포영화 ‘링’, 원작과 비교분석이 새로운 재미
‘드라큐라’
‘뱀파이어’ ‘늑대인간’ ‘프레디 크루거’(나이트 메어) ‘제이슨’ (13일의 금요일) 등 유형적 존재가 공포의 대상이던 헐리우드에서,
보이지 않는 심령적 압박에 머리를 풀어 해친 처녀귀신이 과연 먹힐까?
국내에서도 리메이크 됐던 영화 ‘링’의 미국판 버전은 개봉 첫 주 이러한 우려를 깨끗이 불식시키고 흥행 1위로 올라섰다. ‘멕시칸’의 고어버빈스키가
메가폰을 잡고,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나오미 왓츠가 연기한 ‘링’은 4,300달러의 전형적인 저예산 호러물로 첫 주말 극장수익 예상치는
고작 900만 달러에 불과했다. 하지만, 예상을 깨고 영화는 한 주 동안 1,500달러를 벌어들이며 서구적 악마 캐릭터 한니발 렉터 박사가
등장한 ‘레드 드레곤’을 앞질렀다.
일본에서도 원작의 흥행을 3주만에 갱신한 미국판 ‘링’이 한국에 상영함에 따라 이제는 반대로 금발 배우가 연기한 ‘비디오테이프의 저주’가
이 땅의 관객을 움직일 수 있을지가 관심거리가 됐다. 더구나 우리는 우물귀신 ‘사다코’를 한국판에다가 속편 시리즈까지 지겹도록 보지 않았나.
동양적 공포의 미국적 재현
내용은 일본판과 거의 흡사하다. 초능력을 가진 소녀의 생각이 비디오테이프로 ‘염사’ 되고, 비디오를 보면 1주일만에 죽으며, 귀신의 매개체가
TV라는 등 기본적 설정과 내용이 그대로다. 과학적 추리나 사건의 설명보다는 이미지를 위주로 전개됐던 원작에 비해 미국판은 보다 설명적이다.
하지만, 주인공이 살아남는 방법을 깨닫는 장면은 여전히 비과학적이다. 한국, 미국, 일본의 모든 주인공들이 어떻게 그처럼 생존의 열쇠를
불현듯, 또는 엉성한 복선으로 깨달으며, 무슨 근거로 그처럼 확신에 차 있는지는 납득하기 힘들다.
‘행운의 편지’ ‘우물 속 귀신’이라는 동양적 괴담에 TV라는 일상적 매체를 접목시킨 ‘링’은 영상문화의 지배를 받고 있는 현대인에 대한
경고이자, 동심의 보복으로 읽히기도 한다. 이러한 메시지를 미국판 ‘링’은 미약하지만 부각시키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영상의 지배에 대한
주제는 사실 영화적 내용을 통해 구현되기보다는, 영화 외적인 해석에 가깝다. 영화에서는 직접적으로 다루어지지 않는 다는 뜻이다. 미국판에서도
스치듯 표현될 뿐이지만, 메시지를 염두에 둔 장면이 몇 보인다.
소재의 신선함과 강렬한 반전이 강점인 작품인 만큼, 원작을 본 사람에게는 흥미가 크게 반감된다. 서구적으로 소화된 동양의 공포는 매니아
입장에서는 원작의 본질적 매력을 갉아먹는 느낌일 것이다. 긴 머리를 풀어 해친 백인 귀신에게서 원작과 대등한 공포를 느끼기란 어렵다. 우물에
빠져 죽은 원혼, 참빗으로 머리를 빗는 여인, 거울에 반사되는 귀신 등 동양에서 해묵은 공포의 정서를 미국식으로 재현한 것이 어색하기도
하다.
심령영화
유행 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판 ‘링’은 가치 있는 영화다. 감각적 영상과 으스스한 음향 등이 돋보이며, 차세대 스타 나오미 왓츠의 혼란에 빠진
연기도 주목할만 하다.
무엇보다도 ‘링’은 공포영화의 전환을 예고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미국에서 ‘링’은 ‘식스센스’ ‘죠스’ ‘엑소시스트’ 등에 이은
공포영화 사상 8위의 흥행순위를 기록했다. 공포물 같은 장르영화는 획을 긋는 작품이 나오고 아류작들이 한동안 뒤를 따르는 형식으로 발전되기
마련이다. 피가 튀는 슬래셔 무비는 미국 공포영화사에서 저무는 태양이 된지 오래다. ‘식스센스’ ‘디 아더스’가 심령적 공포영화의 유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면, ‘링’은 동양적 공포의 시대를 본격적으로 열어 젖혔다고 할 수 있다. ‘저주의 바이러스’는 우물에 빠진 귀신의 바람처럼
세계적으로 번져나갔다. 실제로 헐리우드는 ‘링’의 감독 나카다 히데오의 새 호러 판타지 ‘어두컴컴한 물 밑에서’의 리메이크 판권을 개봉
전에 미리 사는 등 일본 공포물에 대한 적극적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링’을 전혀 보지 않았다면 미국판 ‘링’은 매혹적인 작품이 될 것이다. ‘링’ 매니아라면 3국의 ‘링’을 비교 분석하는 즐거움이 있다.
동양적 공포의 서구적 부활은 그 자체로 재미있는 구석이 많다. 한동안 TV를 볼 때마다 무서움에 떨게 했던 섬뜩함은 재현되지 않겠지만,
그 때문에 좀더 편안하고 냉철한 감상이 보장된다.
정춘옥 기자 ok337@sisa-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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