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은 어떤 그룹인가?
두산중공업 노동자 분신 사태로 박용성 회장과 두산그룹에
관심 쏠려…
두산중공업 故 배달호
노동자의 분신자살로 노동계 및 언론의 집중을 받고 있는 ‘박용성’ 두산중공업 회장은 어떠한 사람인가? 그는 현재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IOC
위원 등 공식 직함만도 90여 개가 된다. 이 중 박회장이 회의를 주재하고 신경을 쓰는 직책은 10여 가지이다. 박용성 회장에 대한 재계와
노동계의 평가는 완전히 다르다. 재계의 소신파, 기업구조조정 전도사 등 집념과 뚝심을 겸비한 기업인으로 평가 받는 반면, 이번 두산중공업
노동자의 분신 자살사태로 노동계에서는 그를 ‘악랄한 경영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두산 그룹의 뿌리가 ‘매판자본’이라는 창업주의 친일
행적에 관한 이야기도 고개를 내밀고 있다.
두산의
모태는 매판자본?
반민족문제연구소에서 지난 93년 엮어낸 ‘친일파 99인’ 제2권의 경제인 명단에 두산 그룹의
창업주인 박승직(朴承稷 창씨명 三木承稷 1864~1950)씨가 명기되어 있다. 책에는 박승직씨를 비롯하여 박용성 회장의 부친인 박두병씨까지
일제자본과의 ‘협력관계’를 친일의 과정으로 볼 것인지, 민족 자본의 길로 볼 것인지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바라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다고 명기되어 있지만, 일본 자본과의 합명회사 설립과 ‘친일 자본가의 전형’에 대한 내용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1929년
당시 미쓰이 물산 서울지점장에게 ‘일조협동기업의 개척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박승직씨는 1933년 소화기린맥주의 이사로 참여하게
되고, 이것이 오늘날 두산 그룹의 모태가 되었다. 1941년에는 자신의 상점 이름을 미키상사로 바꾸는데, 미키 쇼우쇼크(三木承稷)는 박승직씨의
창씨명이기도 하다. 책에는 전시체제의 와중에 1938년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의 발기인 겸 상담역으로,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의 평의원으로
참여하여 일제의 총력전체제에 협력한 부분도 보인다. 이러한 일련의 행적들을 민족 자본의 길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농업계에 이어 노동계와 정면충돌
작년 3월 칠레와의 FTA협상과 관련한 박용성 회장의 발언은 농업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었다.
경쟁력 없는 농업을 배려하다가 한국은 5~10년 내에 3등 국가로 추락할 우려가 있으니, 장기적인 관점에서 농업부문을 과감히 포기하는 정책이
필요하다는 직언이 문제가 되었었다.
박용성 회장의 관점에서 노조의 행동은 법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것이었고, 여지껏 비합법,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노사문제가 해결되어 왔기에 무노동
무임금과 같은 규칙이 지켜지지 않는 생산성 향상 격려금, 축하금과 같은 조합원 지급부분에 불만이 많았었다.
일례로 그러한 관행을 뿌리뽑고자 강경책을 썼던 반면, 결과는 노동자의 분신 자살로 돌아왔다. 옛말에 ‘너무 강하면 부러진다’라는 말이 있듯
박용성 회장의 강한 노조대립이 농업계에 이어 노동계로 번지고 있다. 이러한 반면, 두산 그룹은 현재 특혜성 BW 발행과 관련, 유가증권신고서
미제출로 법을 위반한 혐으로 금감위에서 제재조치가 내려질 전망이다. 또한 한국 기업역사상 첫 4세대 재벌 총수로 기록될 것으로 보이는 차기
회장의 윤곽이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어 편법증여의 의혹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이번 고 배달호 노조원의 자살 사태로 노동계와 정면
충돌하고 있는 시점에서 두산중공업 박용성 회장이 재계에서 평가 받고 있듯 소신 있는 모습을 보여줄지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다.
박광규 기자 hasid@sisa-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