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대통령 특유의 ‘불도저식 전략’은 교육정책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영어 공교육’을 깜짝 발표해 혼란을 주더니, 지난 4월15일엔 ‘학교 자율화’를 터트려 학부모와 시민단체 등의 비난을 받고 있다. 두 경우 모두 공정회도 하지 않은 ‘밀실 정책’이었다. 학부모와 교육단체의 의견을 배제한 교육정책은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 가장 큰 피해자는 자신들의 생각과 관련 없이 일방적으로 따라야 할 ‘학생’들이다. 교육단체와 시민단체 등은 정부의 ‘학교 자율화 계획’에 대해 무기한 농성과 시위를 벌이는 등 반발이 확산되고 있다.
촌지, 불법찬조금 액수 급증… ‘폐지한다고?’
문제는 폐지 대상에 포함된 29개 지침 중 0교시, 우열반 편성 규제만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촌지 안 주고 안 받기 운동’, ‘전문계고(실업계고) 현장실습 운영 정상화 방안’ 등 그간 공교육 정상화 과정에서 시행됐던 지침이 단지 ‘규제 철폐’라는 이유로 한꺼번에 폐기되는 데 따른 문제점이 만만치 않다는 것.
참교육학부모회는 “지난 1일부터 2주간 단체에 제보된 불법찬조금 사례만도 수도권 일대에 11건에 달한다”며 “여러 경로를 통해 불법찬조금이 공공연하게 조성되고 있는 현실에서 ‘촌지와 불법찬조금 안주고 안 받기’가 어떻게 학교의 자율성을 저해하는 지침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밝혔다.
참교육학부모회에 따르면 경기도의 D외고에서는 불법찬조금 2억여 원을 조성했다. 2학년의 경우 8개 전 학급, 각 30명의 학생 학부모들이 20만원씩 반 회비 명목으로 돈을 내야 했고, 3학년의 경우 8개 반에서 40만원씩 찬조금을 걷었다. 이 액수가 1억 4000여만으로 1학년까지 포함하면 2억여 원에 달한다.
참교육학부회는 이어 지난 2005년부터 최근 4년간 촌지 및 불법찬조금 근절 상담 센터 자료 분석을 통해 2005년 324건을 기점으로 줄어들던 불법찬조금 사례가 2008년 들어 늘어나면서 그 액수도 점점 커져가고 있다고 밝혔다.
참교육학부모회 윤숙자 회장은 “학교 간에 경쟁이 심해지면서 학생들의 학력 향상을 빌미로 학부모들에게 물심양면으로 학교를 지원해달라는 학교들이 늘어나고 있다”며 “학교 서열화를 부추기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불법 찬조금이 더 음성화되고 액수도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당사자인 학생들의 의견도 ‘반대’로 집중됐다. 서울 고등학생의 83%는 우열반 편성, 0교시, 심야 보충수업 등에 대한 규제를 푼 교육과학기술부의 ‘학교 자율화 추진계획’을 취소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학교 자율화는 공교육의 공식 사망선언’
이런 정부 정책들에 학생들은 학업 스트레스 증가(89.5%), 입시 경쟁교육 강화(84.9%), 사교육비 증가(74.8%), 건강이 나빠질 것(73.2%) 등을 우려했고, 학교교육 정상화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응답은 26.3%에 머물렀다.
범국민교육연대, 입시폐지대학평준화운동본부,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서울지부, 진보신당은 지난 23일 오전 서울 세종로 정부종합청사 후문에서 기자회견을 연 뒤 철야농성에 돌입했다. 이들은 정부가 발표한 ‘학교 자율화 추진계획’을 “규제 완화와 자율 확대를 빙자한 초·중등교육 포기선언”이라고 규정했다. 이어 “교육과학부가 폐지하겠다는 지침들은 대부분 공교육 정상화를 위해 꼭 필요한 최소한의 안전판으로, 만에 하나 이것을 제거할 경우 우리 교육현장은 한 순간에 아수라장이 되고 말 것”이라며 “이는 곧 학생들을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것이며, 껍데기만 남은 공교육의 공식 사망선언”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논란이 확산되자 서울시교육청은 지난 24일 초중고 우려반과 0교시 수업은 없던 일로 하기로 했다.
평준화 정책 무너지나
학벌없는 사회는 이날 성명을 내고 “시민사회가 섣부른 학교 자율화의 문제점을 지적했지만 정부는 여론을 무시하고 버티기로 일관하고 있다”며 “이번 학교자율화 발표 뿐만 아니라 정부의 교육정책을 전면 중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에 앞서 전교조, 학벌없는 사회, 21세기 청소년공동체 희망 등 19개 교육·시민단체는 지난 22일 서울 대학로 흥사단 강당에서 긴급토론회를 열고 그간 지적되어 온 문제점과 더불어 언론에 드러나지 않았던 학교 자율화 계획이 가져올 파장의 심각성을 낱낱이 지적했다.
이날 토론에 나선 배경내 인권교육센터 ‘들’ 상임활동가는 ‘자율’이라는 미명으로 폐지해서는 안 될 지침들이 많다고 지적했다.
배경내 활동가는 “대표적인 것이 △종교교육 교육과정 지도 철저 지침 △전문계고(실업계고) 현장실습 운영 정상화 방안, 그리고 6월 2단계로 폐지될 예정에 있는 △초·중등학교 학교규칙 제정 인가 지침”이라며 “이 지침에는 학생인권을 보장받기 위한 당사자들과 교육·인권단체들의 노고가 배어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들이 폐지되면 종교계 사립학교(이른바 미션스쿨)에서의 종교 예배와 교리 교육 강제를 통한 사상·종교·양심의 자유 침해나 학사일정도 무시한 채 실습 요건도 갖추지 않은 인력업체와 제조업체 등 노동착취 사업장으로 실업계고 학생들을 팔아넘겨왔던 현장실습, 교칙의 횡포를 부채질해 큰 사회 문제로 대두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교과부가 발표한 ‘자율성 확대’ 방안이 실제로는 학생과 교사의 ‘자율성’은 배제된 채 학교장과 학부모의 권한이 강화되는 현상만 낳을 것이라고 우려도 있다. 임병구 국장은 “현재 학교 구성원의 의사 결정 구조는 학교장에게 집중되어 있다”며 “교과부의 권한이 학교로 넘어 가면 현재 임의 조직으로 운영되고 있는 교장협의회의 권한이 강화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민주화를 위한 교수모임의 주경복 건국대 교수는 “교육과학기술부의 학교 자율화 조치는 평준화 해체로 귀결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교육 경쟁이 과열되고 있는 상황에서 자율화, 다양화 정책은 학교 간의 경쟁을 부추겨 학벌을 조장하고 교육 모순을 심화시킬 것이라는 설명이다. 결국 ‘학교 서열화’가 급속도로 퍼지면서 평준화 정책이 물거품이 될 게 뻔하다는 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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